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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유게시판

동문산악회 백두대간 종주산행 기록 (1997-2000)

김용범 25.10.15 54

추가 및 기타 자료는 http://old.seoulsan.com/ 를 보시기 바랍니다.

 

동문산악회 백두대간 종주산행 요약 (1997-2000)


 

일자 / 구간 / 산행코스 / 도상거리(실제거리) / 소요시간(후미소요시간) / 참가인원

(1997년도)

9월5-6일 /1구간 / 중산리-천왕봉-벽소령/ (7.8km+15km) / 12:25 / 48명+추가 10명

9월7일 / 2구간 / 벽소령-노고단-성삼재/ (21km) / 9:50 / 48명+추가 9명

9월20-21일 / 3구간 / 성삼재-만복대-주촌 / 10.3km / 5:00 / 54명+추가 4명

10월11-12일 / 4구간 / 주촌-고남산-매요리 / 18.5km / 7:30(8:30) / 48명

10월25-26일 / 5구간 / 매요리-시리봉-복성이재/ 8.9km / 5:30 / 48명+추가 3명

11월25-16일 / 6구간 / 복성이재-봉화산-중재/ 10.5km+3.5km / 6:05 / 42명+추가 2명

12월13-14일 / 7구간 / 중재-백운산-영취산(무령고개) / 2km+6.9km+0.5km / 5:10(5:40) / 57명+추가4명

(1998년도)

2월21-22일 / 8구간 / (무령고개)영취산-깃대봉-육십령 / 0.5km+11km / 5:45(8:05) / 51명+추가1명

6월5-6일 / 9구간 / 육십령-남덕유산-무룡산-동엽령-(통안리) / (20.5km+3.1km) / 10:30 / 66명

6월7일 / 10구간 / (통안리)-동엽령-지봉-빼재 / 3.1km+11.7km / 7:00(9:40) / 61명

3월7-8일 / 11구간 / 빼재-대덕산-덕산재 / 13.9km / 7:50 / 54명

3월21-22일 / 12구간 / 덕산재-부항령-삼도봉-(물한리) / 13.9km+4.5km / 7:55(9:10) / 53명

4월5일 / 13구간 / (물한리)-삼도봉-화주봉-우두령 / 4.5km+10.2km / 6:00(6:45) / 47명

5월3일 / 14구간 / 우두령-황학산-궤방령 / 13km / 5:40(6:25) / 66명

5월17일 / 15구간 / 궤방령-눌의산-추풍령 / 9.7km / 4:40(5:40) / 66명

8월22-23일 / 16구간 / 추풍령-작점-큰재/ 18km / 8:00(8:55) / 43명

9월5-6일 / 17구간 / 큰재-백학산-지기재/ 17.7km / 7:00(8:30) / 42명

9월20일 / 18구간 / 지기재-신의터재-화령재/ 16.3km / 5:15(5:45) / 36명

10월11일 / 19구간 / 화령재-봉황산-피앗재 / 12.8km / 7:05(7:35) / 45명

10월24-25일 / 20구간 / 피앗재-속리산-늘재 / 15km / 9:05(9:35) / 44명

11월7-8일 / 21구간 / 늘재-조항산-대야산-버리미기재 / 15km / 9:50(11:00) / 39명

12월5-6일 / 22구간 / 버리미기재-악휘봉-은치재 / 8.2km+(1.8km) / 6:10 / 43명

(1999년도)

2월 27-28일 / 23구간 / 은치재-희양산-사다리재 / (1.8km)+8.2km+(1km) / 6:20(7:20) / 64명

3월1일 / 24구간 / 사다리재-백화산-이화령 / (1km)+10.5km / 5:00(6:20) / 62명

3월14일 / 25구간 / 이화령-조령산-문경새재 / 7.7km / 4:45(5:15) / 94명

3월27-28일 / 26구간 / 문경새재-부봉-하늘재 / 8.5km/ 4:50(6:05) / 55명

3월11일 / 27구간 / 하늘재-대미산-차갓재 / 17km+(1km) / 9:20(10:20) / 47명

4월24-25일 / 28구간 / 차갓재-황장산-저수재 / (1km)+12.5km / 6:40(8:25) / 65명

5월8-9일 / 29구간 / 저수재-묘적봉-죽령 / 18.3km / 8:30(9:50) / 47명

5월21-22일 / 30구간 / 죽령-소백산-고치령 / 22.4km+(4km) / 8:55(10:35) / 74명

6월5-6일 / 31구간 / 고치령-선달산-박달령 / (4km)+19.7km+2km / 9:55(11:50) / 56명

8월21-22일 / 32구간 / 박달령-구룡산-곰넘이재 / 13.1km / 8:35(10:40) / 55명

9월4-5일 / 33구간 / 곰넘이재-태백산-화방재 / 15.5km / 7:40(8:20) / 66명

9월18-19일 / 34구간 / 화방재-함백산-두문동재-피재 / 17km / 8:25(9:20) / 42명

10월23-24일 / 35구간 / 피재-덕항산-댓재 / 24km / 10:50(11:20) / 44명

11월7-8일 / 36구간 / 댓재-두타산-이기령 / 17.4km / 9:45(7:45) / 56명

11월20-21일 / 37구간 / 이기령-백봉령-생계령 / 15km / 8:10(9:10) / 44명

12월4-5일 / 38구간 / 생계령-석병산-삽당령 / 12km / 5:25(6:20) / 63명

(2000년도)

3월26일 / 39구간 / 삽당령-석두봉-닭목재 / 13.3km / 5:25(5:50) / 63명+추가 2명

7월22-23일 / 40구간 / 대관령-고루포기산-닭목재 / 12.6km / 4:35(5:20) / 49명

5월27-28일 / 41구간 / 대관령-선자령-노인봉-진고개 / 23.5km / 8:20(9:45) / 45명+추가1명

6월10-11일 / 42구간 / 진고개-두로봉-신배령-구룡령 / 22km / 9:50(11:35) / 48명

7월8-9일 / 43구간 / 구룡령-갈전곡봉-조침령 / 19km / 7:50(11:00) / 49명+추가1명

8월19-20일 / 44구간 / 조침령-북암령-단목령-점봉산-한계령 / 21km / 10:15(11:35) / 47명

9월2,3일 / 45구간 / 한계령-서북릉-대청봉-희운각 / *45-47구간은 여러팀으로 구성 / 11km / 5:30(7:30) / 74명

9월2,3일 / 46구간 / 희운각-1275봉-마등령 / 4km / 4:20(5:00) / 57명+추가1명

9월16-17일 / 47구간 / 미시령-황철봉-마등령 / 8km / 6:55(7:30) / 28명 + 24명 [9월3일: 마등령->미시령 7:00(9:00)]

9월30-10월1일 / 48구간 / 미시령-신선봉-마산-진부령 / 14km / 6:25(7:30) / 115명

* 별도 표기가 없는 한 기록자(선두)인 김관석의 산행시간이며 괄호안의 시간은 종주단 후미의 소요시간임.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종주 참가자 명단 (1997-2000)

* 숫자는 참가구간, 불은 불참구간, 밑줄친 사람은 완주자

 


회(1) : 민영선8,39

회(1) : 최영범33

회(8) : 정재우부인, 주경환(5.6.8.16-18,20-23,25-27,29-33,37-38,45-46,48)

김상익123456812.13.22, 김세원1.2, 이명환1.2, 한재관1.2, 윤태중14,(정용순[불]3-8,11-14,17.18) 이경자[불]1-31,34,47)

8 회(3) : 이승옥, 조대형30, 조용삼48

9 회(1) : 신승현25

10 회(16) : 김문현45-48, 김일웅34789.10.11.17.35.38.39,42, 유두환5.9.10.11.20.23.24.25.45.46,

오수현3789.10.11.20.27, 지경득4.79.10.11,안승우59.10.20.23.24.48,오만준9.10.20.23.24.48, 김명렬48이희경79.10.20,김춘길5.14.45.46-48,정정일9.10, 최성순7, 한영섭7, 김윤환20, 안승우20, 전봉원20

11 회(25) : 정영식, 이익효(불5.17.23.24,40), 홍석의23.24.28-3638.39.42.44-48,

장병수23.24.28.30.33.35.36.38.39.48,박인근1-4.7.14.15.17.23.24.28.30.33.37.39.45-48,이형국7.14.23.24.28.30 조성익347 최권영8.13.15, 안병의39.44, 최승렬20.48이상현1.2.45-47, 박인철5.14,48조병환3.15, 박기남14.16, 서종철3, 이창수7, 강응헌38정응수7, 이영구14, 김연우15.38, 박승훈15, 정주오15, 현민우15, 이해송0, 김상열32.36

12 회(13) : 전선길(3.5.6.8.9.13.14.15.16.18.22.25.28.31.33.38.45.48),조영효(1-15.31.38.45.48),

조병윤(3,5-8,11-14,20),배창현35.20, 장기영5.15.18.22.28.31.38, 송규호12.20.45.47.48, 신경호45.48한광덕13.33.38.45.48, 마정진14.15,오재건14.22, 이민33.48,정기준33, 심재학42.43.45.47.48

13 회(29): 김진수, 박정일(1-36), 최재성4-8,11-16,20-21.25.30.32.34.37.40.42.43.47.48

정영47.9-11.13-17.28.30-32.35-38.40.42-46.48 이영복3789.10.16.22-25.27.28.30.31.34.35.38.39.40이승복 3-7,9-12,14-17.19.25.26.30.31 오휘명7.11.12.14.16.19.28.36.37.40 김형중39.42.43.47.48구현서14.18.23.24.25.26.27.29.45.46.48 심재룡2,11.17.250 김윤일37.40.48, 김종국39, 부인39박영주23.24.25.26.45.46.48, 황재부589.10.11.12.14.15.17, 김석길3.40, 김명준5.34 강태흥13.40박용웅19.25.45 허병훈25.40, 이종훈26, 이경호27 이충희30, 유지한40, 김경모40, 이만영40,최성일40, 노준규 45.46,48 부인48

14 회(14) : 장헌수, 부인12.15.19.20.26.33.37.38.45.46.48, 조병찬(불13.27),

김세현(1-10,12-19,21-34,37,38), 김유황14.29.31.38.41.42.48, 권순명3.12.23.24-26.31-33.35.36.38,김학찬5.7.8.11.12.25, 이웅연1.2, 현창수5.12, 박종훈5, 김영근12.38, 부인12.20.38,여능구부인20, 이장섭25

15 회(2) : 백운학34, 박병길34

16 회(17) : 김승남부인김종교박영철, 부인26.28-31.33.37.39.43.48 최치석, 부인39

이선기1.2.7.21.28.38.48, 김용권6, 고연수7, 김동식25, 차진도25김세환39, 부인39, 박흥권39, 박용운39, 한태수39.40,

17 회(13) : 김인응이정호, 김성곤4, 신중진22.25, 정우택25.39.40.42.44-48, 이영섭25.48,

이길홍25, 이인41-46.48, 심영보41.43, 임창서48, 전태원48, 엄태석48, 하영환48

18 회(21) : 현철수홍기룡, 여상구(불33.35-37.43.45-46), 김승주1-79.10.20.30.33.45-47

윤병철1249.20.45.46.48, 부인45.46;강구철1.2, 손영길1.2, 김강래910,최승규9.10.45.46.48,부인23.24.30, 김정호9.30.42.48, 이영철20,36.45-47, 이민영20, 이상경20, 윤명배20, 최지병7,김대성20,23.24.30, 박기철7, 김동헌48, 부인48

19 회(6) : 김영택20.23.24.48, 권세혁23.24.26.30.38.41.45.46.48, 이혜석23.24,

최재철25.39.42.43.45.48, [자]최종현25.39.42.43.45.48, 성항경45

20 회(21) : 김준호이선길, 부인15.17-20.26.33.34.36-38.42.43.45.46.48, 이정용, 부인 42

남경희(불1-19,21,22), 김웅배(불6.19.25.26.29.40-47), 부인30.32.33.35-37성두섭(불12.14.15.16.19.21.24.28.31.33.36-38.43), 강준수28.29.31.32.36.38.39.41.42.44.47.48신기식1.2.29.35.38,39.41, 송주은7.8 이명인39, 박준상346910.15.25,박승훈25.48, 김병태25, 박남서25, 김학동25, 정창우25, 임동철1.2, 김형철48

21 회(13) : 한효택12.9.10.14.15.19.20.23.24.31.39.43.48, 이강훈1.2.9.10.11.14.19.20.33.36,

박정갑1.2, 최춘선1.2, 김선욱9.10.14.19.23.24.33.36.43.48, 김종군910.14.20, 박관식14.19,이상덕 9, 박건화19, 김상수19.33.43, 이주상19, 성주천36 박경우1.2,

22 회(18) : 이규도, 오성학(불8.18.25.33.34.36.37.40.42-46), 서병일1.2.3.15.33,

최택상(불1.2.5.18.19.26.29.32.39.40.41.43), 이상한23.24.27-30.32.33.39.41.45.48박중배3.4.15, 김진호3.14.48, 강효수3.15, 석균욱23.24, 김시영3,신대식3, 양승찬3,임충빈3,진인준3, 이필중12, 송경헌13.45.46.48, 박흥덕15, 박우규45.46

23 회(2) : 김희준26.28.30.31.36.41.48, 이상경38, (장경신 41,45.48)

24 회(33) : 최종호(불5.16.17.18.27.33-37),변동원(9.10.14.18.23-26.30-33.35-40.42-45.47)

권용술31.35,36 전경태(1-7,9-19,21-26,28-33),윤성원(23-26,28-31,33.44.45)송기복1-7.14,서광석8.9.10.11.13.14.30, 이환동1-4,김동국12.13.14, 조덕연1.2.15, 안영송8.15.25,이수택9.14, 서재영23.24.44, 신길섭31.43 이병해23.24.25.30.45-47,방천환3.32,조창윤4,유갑호11,홍순필11, 이준기13.30, 최경봉23.25.33, 박용기25.30.36.39, 최명식25, 김종헌25.48, 최광수25.30육동신25, 박종면25.33.38, 서남석30, 박종훈41.43-48, 이시열41, 박기설44, 황우성48, 이세용48

25 회(1) : 양명륭(불1-24)

26 회(15) : 김관석, 김완순(불18.23.24.40),곽경호(불3.18.30.39.40-46),권용기(불1.2.5.19.35.37.38.45.46)

정해일(4,23-28,30.38.40-44.48), 김인원3489.10.15.29.30.32-34.37.43.48, 아들3, 이우석41김성화8.11.12.13.14, 이경욱7.8.12, 이의종35, 박종태3, 황승하11, 김영학14, 손홍식28,

27 회(1) : 최병조25.26.27

28 회(2) : 최영규25.26.27.30.33.47.48, 조원장30, 한만엽47.48

29 회(3) : 이의승16.18.20,21.25.26.27.28.30.35, 김영선25.27.28.29.30.31.32.36.39.41.44.45.47.48,

양승무32.40.44

30 회(2) : 김지영8.11.12.14.17, 신춘호28

34 회(1) : 김대영25

35 회(1) : 박종원25.28.48

36 회(7) : 박화승14.19.29.31.32.36.38.48, 부인38, 최규석14.36, 신중구14, 김용석14, 장병권48, 주대오48

37 회(1) : 최대성28

38 회(2) : 이동혁25.28, 이태석31.32.37

39 회(4) : 김상영(불1-15,18,20.29.31.35.36.40-47) 김종훈25.28, 오호근25.48, 양재훈25

46 회(2) : 최재혁, 견우병

51 회(1) : 정보영

 * 괄호안 이름은 동문가족이 아닌 지속적인 참가자임.

 

  참가 동문 총인원 287명, 완주자 20명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 2구간 산행 (97년9월5-7일)

(날씨 : 맑음) 중산리-천왕봉-벽소령-노고단-성삼재

7회 : 김상익, 김세원, 이명환, 정재우, 부인, 한재관, (+3)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지경득 - 노고단으로 마중을 나오심)
11회 : 박인근, 이상현, 이익효, (이해송-포기하심), 정영식
12회 :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심재룡*
14회 : 김세현, 이웅연,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이선기,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강구철, 김승주, 손영길, 여상구, 윤병철,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웅배, 김준호*, 성두섭, 신기식, 이선길, 이정용, 임동철
21회 : 박경우, 박정갑, 이강훈, 최춘선, 한효택
22회 : 서병일, 오성학, 이규도
24회 : 송기복, 이환동, 전경태, 조덕연*, 최종호
26회 : 곽경호*, 김관석, 김완순
(총 57명) *표시 9명은 98/6/20에 당일종주

서울압구정 발 22:00 - 9월5일
중산리 발 6:30 - 9월6일
천왕봉 1951 착 10:20 발 11:45
장터목 착 12:30 (점심식사) 발 13:30
세석산장 착 15:15 발 15:15
벽소령산장 착 18:55 발 05:45 - 9월7일
연하천산장 착 07:30 (아침식사) 발 09:50
화개재 10:40
반야봉 1734 11:55
임걸령 12:40
성삼재 착 15:20 발 16:30
서울압구정 착 23:3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구간 산행 (97년9월20-21일)
(날씨 : 맑음) 성삼재-만복대-고기리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오수헌
11회 : 박인근, 서종철, 이익효(+2), 정영식*, 조병환, 조성익
12회 : 배창현,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석길,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이영복
14회 : 권순명,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
16회 : 박영철, 김승남, 부인*, 김종교,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승주,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웅배, 김준호*, 박준상, 성두섭, 이선길, 이정용
22회 : 강효수, 김시영, 김진호, 박중배, 서병일, 신대식, 양승찬, 오성학, 이규도, 임충빈, 진인준, 최택상
24회 : 방천환, 송기복, 이환동, 전경태, 최종호
26회 :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김인원, 아들, 박종태, 이의종
(총 68명) * 4명은 98/10/18에 다녀옴

서울압구정 발 22:00 - 9월20일
구레역 앞 착 03:30 - 9월21일 발 04:40 (아침식사)
성삼재 발 06:00
만복대 1433 08:00
정령치 착 08:50 발 09:10
고리봉 1305 09:35
고기리 착 11:00 발 13:25
서울압구정 착 19:0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4구간 산행 (97년10월11-12일)
(날씨 : 맑음) 덕치리-고남산-매요리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지경득
11회 : 박인근, 이익효, 정영식, 조성익
12회 :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정 영, 최재성
14회 :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성곤,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승주, 여상구, 윤병철,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웅배, 김준호, 박준상, 성두섭, 이선길, 이정용
22회 : 박중배,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송기복, 이환동, 전경태, 조창윤,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김인원, 정해일
(총 54명)

서울압구정 발 23:00 -10월11일
남원역 앞 착 2:50 -10월12일 발 4:35
운천 초등학교 발 5:30
가재마을 발 6:00
여원재 착 8:25 발 8:55
고남산 846착 10:40 발 11:30
매요리 착 13:00(후미14:00) 발 15:25
서울 평양면옥 착 21:3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5구간 산행 (97년10월25-26일)
(날씨 : 맑음) 매요리-복성이재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주경환
8회 : 이승옥* 98/9/23 다녀옴
10회 : 김춘길, 안승우, 유두환
11회 : 박인철, 정영식
12회 : 장기영,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배창현
13회 : 김명준, 김진수, 박정일, 오희명, 이승복, 최재성, 황재부
14회 : 김세현, 김학찬, 박종훈, 장헌수, 조병찬, 현창수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승주,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00/8/12 다녀옴
20회 : 김웅배, 김준호, 성두섭, 이정용, 이선길** 98/11/1 다녀옴
22회 : 오성학, 이규도
24회 : 송기복, 전경태
26회 : 곽경호, 김관석, 김완순, 이의종
(총 51명)

서울압구정 발 23:00 -10월25일
남원역 앞 착 2:45 -10월26일 발 5:15 (아침식사)
매요리 착 5:45 발 6:00
사치재 착 6:50 발 7:00
시리봉 777 착 8:50 발 9:00
복성이뒷재 착 11:00 발 11:15
복성이재 11:30
아영초등교 착 11:45 (점심식사) 발 13:00
서울 평양면옥 착 19:1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6구간 산행 (97년11월15-16일)
(날씨 : 맑음) 복성이재-봉화산-중재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주경환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최재성
14회 :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2000.9.24)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김용권,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승주,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박준상, 이선길, 이정용, 성두섭*(2000.9.24)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송기복,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총 44명)

서울압구정 발 23:00 -11월15일
지리산휴게소 착 3:50 -11월16일 발 5:00 (아침식사)
복성이재 착 5:45 발 5:55
제1고지(치재?) 6:15
꼬부랑재 위 750 7:20
봉화산 920 7:45
광대치 전 9:05
월경산입구 980 착 10:00 발 10:20
운산리 운산교 착 12:00 (점심식사) 발 14:00
서울 압구정 착 20:3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7구간 산행 (97년12월13-14일)
(날씨 : 흐리다가 개었음) 중재-백운산-영취산(무령고개)

7회 :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오수헌, 이희경, 지경득, 최성순, 한영섭
11회 : 박인근, 이익효, 이창수, 이형국, 정영식, 정응수, 조성익
12회 :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오휘명, 이승복, 이영복, 정영, 최재성
14회 : 김세현, 김학찬, 장헌수, 조병찬**(2000.9.24)
16회 : 고연수,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이선기,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승주,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최지병, *박기철 (2000.9.10)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송주은, 이선길, 이정용,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송기복,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이경욱
(총 61명) * 추가 4명 포함

서울압구정 발 23:10 -12월13일
지리산휴게소 착 3:50 -12월14일 발 5:00(아침식사)
운산리 5:40
중재 착 6:15 발 6:30
중고개재 755 착 7:15
백운산 1278 착 9:20 발 9:40
영취산 1075 11:00 - 11:30
무령고개 착 11:40 (후미12:10) 발 12:30
진안 음식점 착 1:30 발 3:35
서울 압구정 착 7:5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8구간 산행 (98년2월21-22일)

(날씨 : 맑음) 영취산-깃대봉-육십령

3회 : 민영선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주경환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오수헌
11회 : 이익효, 정영식, 최권영
12회 :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영복, 최재성, 황재부
14회 : 김세현, 김학찬, 장헌수, 조병찬*(2000.9.24)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송주은, 이선길, 이정용
22회 : 이규도, 최택상
24회 : 서광석, 안영송,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성화, 김완순, 김인원, 이경욱
30회 : 김지영
(총 52명)

서울압구정 발 23:00 -2월21일
육십령휴게소 착 2:45 -2월22일 (아침식사)
발 5:30
무령고개 930 발 6:05
영취산 1075 착 6:35 발 6:50
전망대바위 9:10
민령 착 9:50 발 10:10
깃대봉 1015 10:50
육십령 700 착 11:50 (후미14:10) 발 14:35
안성휴게소 발 16:30 (점심식사)
서울 압구정 착 21:0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1구간 산행 (98년3월7-8일)
(날씨 : 맑음) 빼재-대덕산-덕산재

7회 :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5명은 소사고개부터 시작), 오수헌*, 유두환*, 지경득*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심재룡, 오휘명, 이승복, 정 영, 최재성, 황재부
14회 : 김학찬,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이선길, 이정용
21회 : 이강훈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서광석, 유갑호, 전경태, 최종호, 홍순필**(**소사고개까지 등산)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성화, 김완순, 황승하**
30회 : 김지영
(총 54명)

서울압구정 발 23:30 -3월7일
무주구천동 착 3:10 -3월8일 발 6:00 (아침식사)
빼재 6:20
된새미기재 7:00
호절골재 착 11:25 발 11:55
삼봉산 1254 착 8:20 발 8:30
소사고개 착 9:50 발 10:10
삼도봉 1250 10:45
대덕산 1290 착 12:30 발 13:00
덕산재 주유소 착 14:10 발 16:15 (점심식사)
서울 압구정 착 20:15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12구간 산행 (98년3월21-22일)
(날씨: 오전에 바람이 불고 눈발도 날리다가 개었음) 덕산재-부항령-삼도봉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송규호, 조병윤,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오휘명, 이승복, 최재성, 황재부
14회 : 권순명, 김세현, 김영근, 부인, 김학찬, 장헌수, 부인,
조병찬, 현창수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이선길, (친구-김웅규), 이정용
22회 : 오성학, 이규도, 이필중, 최택상
24회 : 전경태, 최종호, 김동국*(<-중1 동기)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성화, 김완순, 이경욱
30회 : 김지영
(총 53명)

서울압구정 발 23:30 -3월21일
무주구천동 착 2:50 -3월22일 발 5:30 (아침식사)
덕산재 6:05
헬기장 853 착 7:00 발 7:30
부항령 8:00
헬기장 1030 9:15
전망대봉 1150 10:25
삼도봉 1177 착 11:50 발 12:30
삼도봉 안부 12:45
물한리 주차장 착 2:00 (후미3:15 ) 발 4:15 (점심식사)
서울 압구정 착 8:1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3구간 산행 (98년4월5일)
(날씨: 비) 삼도봉-화주봉-우두령

7회 : 김상익,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최권영
12회 :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한광덕
13회 : 강태흥, 김진수, 박정일, 정영, 최재성,
14회 : 김세현, 장헌수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이선길, 이정용
* 22회 : 송경헌,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김동국, 서광석, 이준기,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성화, 김완순
(총 47명)
(* 22회 4명은 별도로 4월26일 역방향으로 다녀왔음.)

서울압구정 발 6:40
물한리 주차장 10:40
삼도봉 안부 1000 착 12:15
발 12:35
밀목재 13:15
1175봉 14:55
화주봉 1207 착 15:35
발 15:45
우두령 착 16:40 (후미)17:25
서울압구정 착 24:1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4구간 산행 (98년5월3일)
(날씨: 흐림) 우두령-황악산-궤방령

7회 : 윤태중, 정재우, 부인
8회 : 이승옥
10회 : 김춘길
11회 : 박기남, 박인근, 박인철, 이영구, 이익효, 정영식
12회 : 마정진, 오재건, 전선길, 조병윤, 조영효
13회 : 구현서, 김진수, 박정일, 오휘명, 이승복, 정영, 최재성, 황재부
14회 : 김세현, 김유황,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이선길, (친구-김웅규), 이정용
22회 : 김진호,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1회 : 이강훈, 김선욱, 김종군, 박관식, 한효택
24회 : 김동국, 변동원, 서광석, 송기복, 이수택,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성화, 김완순, 김영학
30회 : 김지영
(총 66명)

서울 압구정 발 6:40
우두령 질매재 720 10:10
삼성산 985.6 11:00
바람재 810 착 11:55 발 12:10
황악산 1111.4 착 12:55 발 13:40
여시골산 착 15:05 발 15:30
궤방령 310 착 15:50 (후미16:25) 발 16:25
서울압구정 착 19:35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15구간 산행 (98년5월17일)
(날씨: 흐림) 궤방령-눌의산-추풍령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8회 : 이승옥
11회 : 김연우, 박승훈, 박인근, 이형국, 이익효, 정영식,
정주오, 조병환, 최권영, 현민우
12회 : 마정진, 장기영, 전선길, 조영효,
13회 : 김진수, (+미스리), 박정일, 이승복, 정영, 최재성, 황재부
14회 : 김세현, 장헌수, 부인,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박준상, 이선길, 부인, 이정용
22회 : 강효수, 박중배, 박흥덕, 서병일,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1회 : 한효택
24회 : 안영송, 조덕연,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김인원
36회 : 김용석, 최규석, 신중구, 박화승
(총 66명)

서울 압구정 발 6:30
궤방령 310 9:45
가성산 715 착11:20
발 11:35
눌의산 743 착12:35
발 13:40
추풍령 착 14:25 (후미15:25) 발 15:35
서울압구정 착 19:0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9, 10구간 산행 (98년6월5-8일)
(날씨: 6/6 흐리고 간혹 이슬비, 6/8 흐림) 육십령-장수덕유-동엽령-지봉-빼재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지경득*@, 오수헌, 안승우, 유두환, 이희경*@, 오만준*@, 정정일 *6/6 삿갓골재에서 하산, @6/7향적봉 경유 하산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전선길(9구간만), 조영효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이영복, 정영, 황재부, +이병숙
14회 : 김세현, 장헌수(6/6당일종주), 조병찬(6/6당일종주)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김강래, 김승주, 김정호(9구간만), 여상구, 윤병철(9구간만), 최승규,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6/6당일종주), 김웅배(6/6당일종주), 박준상(@6/7향적봉경유하산), 성두섭(6/6당일종주), 이선길, 이정용
21회 : 김선욱*, 김종군*, 이강훈*, 이상덕*(9구간만), 한효택*, *6/6 삿갓골재에서 하산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변동원, 서광석, 이수택*(9구간만), 조덕연,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김인원
(총 9구간 66명, 10구간 61명)

서울 압구정 발 23:20 (6/5)
육십령 700 5:30 (6/6)
할미봉 1026 6:30
장수덕유 1510 착 8:35 발 8:50
삿갓봉 10:30
무룡산 착 11:45 발 12:20
동엽령 13:30
동엽령삼거리 13:50
통안리 착 16:00 발 6:30(6/7)
동엽령삼거리 8:10
백암봉 8:55
지봉 착 10:30 발 10:40
지봉삼거리 착 11:30 발 12:00
신풍령휴게소 13:30 (후미16:10)
서울 압구정 착 23:5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6구간 산행 (98년8월22-23일)
(날씨: 비오다가 흐림) 추풍령-작점고개-국수봉-큰재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8회 : 이승옥
11회 : 박기남, 이익효, 정영식
12회 : 전선길
13회 : 김진수, 박정일, 오휘명, 이승복, 이영복, 정영, 최재성
14회 :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이선길, 이정용
22회 : 오성학(국수봉 구간), 이규도, 최택상
24회 : 전경태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29회 : 이의승
39회 : 김상영
(총 43명)

서울 압구정 발 23:00 (8/22)
추풍령 5:35 (8/23)
작점고개 착 8:50 발 9:00
용문산 710 착 10:55 발 11:10
국수봉 793 착 12:05 발 12:35
큰재 착 13:35 (후미 14:30) 발 16:00
서울 압구정 착 19:4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17구간 산행 (98년9월5-6일)
(날씨: 맑음) 큰재-백학산-지기재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11회 : 박인근, 정영식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정영, 황재부, 심재룡
14회 :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이선길, 부인, 이정용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전경태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30회 : 김지영
39회 : 김상영
(총 42명)

서울 압구정 발 23:00 (9/5)
큰재 6:20 (9/6)
회룡재 착 7:30
발 7:40
505 8:35
백학산 615 착 10:30 발 11:10
개머리재 12:30
지기재 착 13:20 (후미14:50) 발 16:10
서울 압구정 착 20:1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8구간 산행 (98년9월20일)
(날씨: 흐린 후 비) 지기재-윤지미산-화령재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전선길, 장기영
13회 : 김진수, 박정일, 구현서
14회 : 김세현,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김웅배, 성두섭, 이선길, 부인, 이정용
22회 : 이규도
24회 : 전경태, 변동원
26회 : 권용기, 김관석
29회 : 이의승
(총 36명)

서울 압구정 발 06:40
지기재 10:30
신의터재 착 11:35 발 11:45
무지개산 착 12:55 발 13:20
윤지미산 착 14:40 발 15:00
화령재 착 15:45(선두)
화령주유소 착 16:00 (후미 16:40) 발 17:00
서울 압구정 착 22:3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19구간 산행 (98년10월11일)
(날씨: 흐림) 화령재-봉황산-형제봉-피앗재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3회 : 김진수, 박정일, 박용웅, *이승복, *오휘명
14회 : 김세현, 장헌수, 부인,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21회 : 김상수, 김선욱, *박건화, *박관식, 이강훈, *이주상, 한효택
22회 : 오성학, 이규도
24회 :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김관석, 김완순
26회 : 박화승
39회 : 김상영
(총 45명)
밑줄친 사람은 최초참석자 *표시한 5명은 비재에서 하산

서울 압구정 발 6:45
화령재 발 9:55
봉화산 740.8 착 11:25 발 11:40
510 (점심) 착 13:00 발 13:35
갈령삼거리 15:05
형제봉 착 15:30 발 15:45
피앗재 착 16:15 발 16:30
만수동 17:00
만수이교 착 17:30 (후미)18:00 발 18:30
서울 압구정 착 22:3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0구간 산행 (98년10월25일)
(날씨: 맑음) 피앗재-천황봉-늘재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8회 : 이승옥
10회 : 유두환, 김윤환*(*문장대에서 하산), 안승우*, 오만준*, 오수현*, 이희경*, 전봉원*
11회 : 이익효, 정영식, 최승렬
13회 : 김진수(**24,25일 왕복종주), 박정일**, 최재성**
14회 : 장헌수**, 부인*, 조병찬**, 김영근부인*, 여능구부인*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윤병철, 이경철, 김승주*, 이민영*, 이상경*,홍기룡*, 윤명배*, 김대성*
19회 : 김영택
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김웅배, 남경희, 성두섭***(24일 역방향종주)
22회 : 오성학****(밤티재에서 하산), 이규도, 최택상
24회 :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29회 : 이의승
(총 64명) <- 44명 완주

서울 압구정 발 23:00 - 24일
송은식당 착 2:30 - 발 5:30 <추천> 가장 맛있고 저렴한 최고의 민박식당
만수동 5:50
피앗재 착 6:25 - 발 6:35
703봉 착 7:35 - 발 7:45
천황봉 착 8:55 - 발 9:10
문장대 착 10:50 - 발 11:50 (점심식사)
밤티재 13:35
늘재 착 14:55 (후미 15:2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1구간 산행 (98년11월8일)
(날씨: 맑음) 늘재-청화산-조항산-밀재-대야산-버리미기재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3명은 밀재에서 하산), 정용순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3회 : 김진수, 박정일, 최재성
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세현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이선기
17회 : 김인응, 이정호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29회 : 이의승*
36회 : 김상영
(총 39명) <- 36명 완주

서울 압구정 발 23:15 - 7일
대동식당 착 2:00 - 발 5:40 (아침식사)
늘재 발 5:45
전망대 착 7:10 - 발 7:25 (청화산 984 전)
갓바위재 착 8:55 - 발 9:05
조항산 951 9:40
밀재 착 11:20 - 발 12:15 (점심식사)
대야산 930 착 13:05 - 발 13:20
촛대봉 668 착 14:05 - 발 14:10
불란치재 14:20
미륵바위 착 14:35 - 발 14:45 (곰넘이봉 733 전)
버리미기재 착 15:35 (후미 16:45) - 발 16:50
서울압구정 착 22:3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22구간 산행 (98년12월5,6일)
(날씨: 흐리고 약간의 눈) 버리미기재-장성봉-악휘봉-은치재

7회 : 정재우, 부인, 김상익, 주경환, 정용순
8회 : 이승옥* (*악휘봉 삼거리에서 은티마을로 직접하산)
11회 : 이익효, 정영식
12회 : 전선길, 장기영, 오재건
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영복
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세현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신중진
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성두섭
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24회 : 전경태, 최종호
26회 : 곽경호, 권용기, 김관석, 김완순
36회 : 김상영
(총 43명)

서울 압구정 발 23:10 - 5일
돌마당식당 착 2:10 - 발 5:55 (아침식사)
버리미기재 발 6:25
장성봉 착 7:25 - 발 7:30
827봉 8:15
821봉 악휘봉전 착 9:35 - 발 <선두9:50>10:30 **
** 기록자와 성두섭 2인은 악휘봉 동북쪽 언덕까지 내려갔다 올라옴
은치재 착 <선두10:50>11:10 - 발 <선두11:20>11:50 ***
*** 후미를 기다림
은티마을 착 <선두11:55>12:20 - 발 13:00 (점심식사)
수안보호텔 착 13:25 - 발 15:00
서울 양재동 19:1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3-24구간 산행 (99년2월28일, 3월1일)

<fontsize=3>(날씨: 2월28일 맑음, 3월1일 흐림) 지름티재-희양산-사다리재-백화산-이화령

<fontsize=3>2월28일 A팀 은티마을-구왕봉-희양산-사다리재
<fontsize=3>B팀(b) 은티마을-성곽갈림길-희양산-사다리재
<fontsize=3>C팀-보조자일설치(c) 은티마을-지름티재-희양산-사다리재
<fontsize=3>3월1일 A팀 암말-사다리재-백화산-조봉-이화령
<fontsize=3>B팀(d) 암말-억새밭-조봉-이화령

<fontsize=3>7회 : 정재우<사전답사>c, 부인, 주경환(23구간만),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0회 : 유두환, 안승우, 오만준
<fontsize=3>11회 : 정영식, 박인근, 이형국, 장병수, 홍석의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정영b, 이영복, 구현서b, 박영주
<fontsize=3>14회 : 장헌수<사전답사>bd, 조병찬b, 김세현bd, 권순명bd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김대성bd, 부인bd
<fontsize=3>19회 : 김영택cd, 권세혁cd, 이혜석cd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사전답사>(시루봉에서 하산), 이정용, 김웅배, 성두섭(23구간만), 남경희
<fontsize=3>21회 : 한효택bd, 김선욱bd, 박관식bd
<fontsize=3>22회 : 오성학, 이규도, 최택상, 석균욱, 이상한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변동원, 서재영, 윤성원, 이병해, 최경봉(23구간만)
<fontsize=3>26회 : 김관석<사전답사>, 곽경호, 권용기, 정해일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64명)

<fontsize=3><2월28일 A코스>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8:15
<fontsize=3>은티마을 10:20
<fontsize=3>은치재 11:10
<fontsize=3>구왕봉898 착 11:55 - 발 12:05
<fontsize=3>지름티재 12:20
<fontsize=3>희양산갈림길 착 13:05 - 발 14:05 (희양산998왕복, 점심식사)
<fontsize=3>이만봉989 15:45
<fontsize=3>사다리재 16:10
<fontsize=3>암말 16:40 (후미는 17:40 도착)
<fontsize=3><3월1일 A코스>
<fontsize=3>암말 발 8:40
<fontsize=3>* 기록자가 사다리재 1/2이상 올라가다 물건을 찾으러 암말에 내려갔다가 옴.
<fontsize=3>사다리재 착 9:55 - 발 10:00
<fontsize=3>백화산1063 11:25
<fontsize=3>910봉 12:05
<fontsize=3>조봉 13:05
<fontsize=3>이화령 13:40 (후미는 15:00 도착)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7:10
<fontsize=3>이화령 10:00 - 10:15
<fontsize=3>조령산1026 11:30
<fontsize=3>889 11:55 - 12:00
<fontsize=3>937다음안부 12:40 - 13:10 (점심식사)
<fontsize=3>923다음삼거리 14:20
<fontsize=3>조령제3관문 15:00 (후미는 15:30 도착)
<fontsize=3>휴양림아래주차장 15:30 - 17:00
<fontsize=3>양재역 20:2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5구간 산행 (99년3월14일)

<fontsize=3>(날씨: 흐림) 이화령-조령산-문경새재

<fontsize=3>7회 : (6)정재우, 부인, 주경환, 엄기운*, 정용순, 외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9회 : 신승현*
<fontsize=3>10회 : 유두환
<fontsize=3>11회 : (5)이익효, 정영식, 장병수, 최승렬, 홍석의
<fontsize=3>12회 : 전선길**
<fontsize=3>13회 : (12)김진수, 박정일, 이영복, 구현서, 박영주, 심재룡, 이승복, 박용웅, 허병훈*, 최재성**, 외2
<fontsize=3>14회 : (6)장헌수, 조병찬, 김세현, 김학찬, 권순명, 이장섭*
<fontsize=3>16회 : (7)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김동식*, 차진도*
<fontsize=3>17회 : (6)김인응, 이정호, 신중진, 정우택*, 이영섭*, 이길홍*
<fontsize=3>18회 : (3)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19회 : (2)최재철*, (자)최종현*
<fontsize=3>20회 : (11)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성두섭, 남경희, 박준상, 박승훈*, 김병태*, 박남서*, 김학동*, 정창우*
<fontsize=3>22회 : (2)이규도, 최택상**
<fontsize=3>24회 : (13)전경태, 최종호, 변동원, 윤성원, 이병해, 최경봉, 안영송, 박용기*, 최명식*, 김종헌*, 최광수*, 육동신*, 박종민*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5)김관석, 곽경호,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fontsize=3>27회 : 최병조*
<fontsize=3>28회 : 최영규
<fontsize=3>29회 : 이의승, 김영선
<fontsize=3>34회 : 김대영*
<fontsize=3>35회 : 박종원
<fontsize=3>38회 : 이동혁
<fontsize=3>39회 : (4)김상영, 김종훈오호근양재훈
<fontsize=3>(총 94명)
<fontsize=3>* 처음나오신 동문 + 밑줄친 사람 : 처음 합류한 마운틴빌라 (계32명)
<fontsize=3>** 총산우회를 위해 조령산까지만 산행하신 임원 (3명)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6구간 산행 (99년3월28일)

<fontsize=3>(날씨: 맑고 바람이 많이 불었음) 문경새재-부봉-하늘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구현서, 이승복, 이종훈*, 박영주, (외1)
<fontsize=3>14회 : 장헌수, 부인, 조병찬, 김세현, 권순명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19회 : 권세혁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성두섭, 남경희, (김웅규)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fontsize=3>23회 : 김희준*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변동원, 윤성원,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곽경호,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fontsize=3>27회 : 최병조
<fontsize=3>28회 : 최영규
<fontsize=3>29회 : 이의승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55명)
<fontsize=3>* 처음나오신 동문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7:00
<fontsize=3>휴양림아래주차장 9:45
<fontsize=3>마폐봉입구** 10:00 - 10:10
<fontsize=3>764 11:30
<fontsize=3>동암문 11:50 - 12:00
<fontsize=3>959 12:40
<fontsize=3>월항삼봉아래 13:10-13:35 (점심식사)
<fontsize=3>하늘재 14:35 (후미15:50)
<fontsize=3>미륵리주차장 15:00
<fontsize=3>압구정동 착 21:00

<fontsize=3>**조령-마폐봉 대간길을 약간 벗어나 조령아래에서 마폐봉으로 곧장 올라갔음.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7구간 산행 (99년4월11일)

<fontsize=3>(날씨: 맑음) 하늘재-대미산-차갓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0회 : 오수현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구현서, 이영복, 이경호*
<fontsize=3>14회 : 장헌수, 김세현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성두섭, 남경희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최택상, 이상한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곽경호,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fontsize=3>27회 : 최병조
<fontsize=3>28회 : 최영규
<fontsize=3>29회 : 이의승, 김영선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47명)
<fontsize=3>* 처음나오신 동문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05 - 4월10일
<fontsize=3>미륵리 1:35 - 5:50 (휴식 및 아침식사)
<fontsize=3>하늘재 6:20 - 6:35
<fontsize=3>포암산 961.8 7:15 - 7:20
<fontsize=3>938.3 8:35
<fontsize=3>1032 10:25 - 10:35
<fontsize=3>대미산 1115 11:55 - 12:40 (점심식사)
<fontsize=3>981 13:55 - 14:00
<fontsize=3>차갓재 14:42
<fontsize=3>생달리 15:10 (후미 16:10) - 17:0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0:4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28구간 산행 (99년4월25일)

<fontsize=3>(날씨: 맑음) 차갓재-황장산-벌재-저수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박인근, 홍석의, 이형국, 장병수
<fontsize=3>12회 : 전선길, 장기영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정영, 오휘명, 이영복
<fontsize=3>14회 : 장헌수, 김세현, 조병찬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이선기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19회 : 이혜석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남경희, 강준수*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최택상, 이상한
<fontsize=3>23회 : 김희준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윤성원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곽경호,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손홍식**
<fontsize=3>29회 : 이의승**, 김영선 / 30회 : 신춘호* / 35회 : 박종원* / 37회 : 최대성*
<fontsize=3>38회 : 이동혁 / 39회 : 김상영, 김종훈 / 46회 : 최재혁*, 견우병*
<fontsize=3>(총 65명)
<fontsize=3>* 처음나오신 동문
<fontsize=3>** 벌재까지만 산행했음, 손홍식 동문은 처음 참여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00 - 4월24일
<fontsize=3>안생달 1:35 - 5:50 (휴식 및 아침식사)
<fontsize=3>작은 차갓재 6:20
<fontsize=3>황장산 1077 7:15 - 30
<fontsize=3>1004봉 8:30 - 40
<fontsize=3>928 9:15
<fontsize=3>벌재 9:44-55
<fontsize=3>문봉재 12분전 10:55 - 11:25 (점심식사)
<fontsize=3>저수재 12:30 (후미 14:15)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0:45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29구간 산행 (99년5월9일)

<fontsize=3>(날씨: 흐린 후 맑음) 저수재-도솔봉-죽령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구현서
<fontsize=3>14회 : 장헌수, 김세현, 조병찬, 김유황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남경희, 성두섭**, 강준수***, 신기식***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이상한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윤성원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곽경호, 김완순, 권용기, 김인원 <수정>
<fontsize=3>29회 : (이의승*), 김영선
<fontsize=3>36회 : 박화숭
<fontsize=3>(총 47명)
<fontsize=3>* 신체이상으로 등산 포기
<fontsize=3>** 화상이 완쾌되지 않아 배재에서 하산
<fontsize=3>*** 신기식 동문의 인대이상으로 강준수 동문과 함께 묘적령에서 하산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0:50 - 5월8일
<fontsize=3>... 교통혼잡으로 못오고 있다는 전화를 받고 기다린 후 50분 늦게 출발
<fontsize=3>남조리 맛나여관 23:40 - 5:30 (수면 및 아침식사)
<fontsize=3>저수재 발 6:00
<fontsize=3>시루봉 1110 6:55
<fontsize=3>싸리재 7:55
<fontsize=3>솔봉 1103 9:30
<fontsize=3>묘적령 10:25
<fontsize=3>도솔봉 1314 11:45 - 12:20 (점심식사)
<fontsize=3>1260봉 12:55 - 13:00
<fontsize=3>1290봉 13:20 - 13:30
<fontsize=3>약수터 14:00 - 14:10
<fontsize=3>죽령 14:30 (후미 15:5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0:45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0구간 산행 (99년5월22일)

<fontsize=3>(날씨: 맑음) 죽령-소백산-고치령 (존칭생략)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fontsize=3>8회 : 조대형, 이승옥(6월28일)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박인근, 홍석의, 장병수, 이형구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최재성, 이승복, 정영, 이영복, 이충희*
<fontsize=3>14회 : 장헌수, 김세현, 조병찬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김승주, 김정호, 김대성, 부인
<fontsize=3>19회 : 권세혁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부인, 남경희, 성두섭, 강준수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최택상, 이상한
<fontsize=3>23회 : 김희준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윤성원, 서광석, 이병해, 김종헌, 서남석*, 변동원**, 최광수**, 이준기**, 박용기**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김인원, +(2인)
<fontsize=3>28회 : 최영규***, 조원장*+***, +(김장원)
<fontsize=3>29회 : 이의승, 김영선
<fontsize=3>(총 74명)
<fontsize=3>* 처음 나온 동문 3명 ** 변동원 동문의 인솔하에 국망봉에서 하산
<fontsize=3>*** MTB로 죽령-비로봉-(하산)-세거리 구간 주파; 김장원은 완주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0:10 - 5월22일
<fontsize=3>죽령 발 4:10
<fontsize=3>천체관측소 6:00 - 6:45 (아침식사)
<fontsize=3>제1연화봉 1394 7:20 - 7:25
<fontsize=3>비로봉 1439 8:10 - 8:15
<fontsize=3>국망봉 1420 9:10 - 9:20
<fontsize=3>늦은맥이고개 10:05
<fontsize=3>3/7구간 10:41 - 11:11 (점심식사)
<fontsize=3>1310.6 12:05
<fontsize=3>고치령 착 13:05 (후미 14:45)
<fontsize=3>세거리 착 14:20-16:00 (계곡에서 쉬어가면서 하산)
<fontsize=3>(A팀 43명) 서울 압구정 착 21:10 <22일>
<fontsize=3>(B팀 30명+전선길 회장, 19회 이혜석) 다음날 영월 동강에서 래프팅후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2:30 <23일>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1구간 산행 (99년6월6일)

<fontsize=3>(날씨: 흐림) 고치령-선달산-박달령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6월28일)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fontsize=3>12회 : 전선길, 조영효, 장기영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승복, 정영, 이영복
<fontsize=3>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유황, 권순명**, 김세현**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남경희, 강준수**
<fontsize=3>21회 : 한효택
<fontsize=3>22회 : 이규도, 오성학, 최택상
<fontsize=3>23회 : 김희준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윤성원, 변동원, 권용술*, 신길섭*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fontsize=3>29회 : 김영선
<fontsize=3>36회 : 박화숭
<fontsize=3>38회 : 이태석*
<fontsize=3>(총 56명)
<fontsize=3>* 처음 나온 동문 3명
<fontsize=3>** 늦은목이에서 하산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00 <6월5일>
<fontsize=3>세거리 발 3:30 <6월6일>
<fontsize=3>고치령 4:30 - 4:40
<fontsize=3>950봉 지나서 5:10 - 5:40 (아침식사)
<fontsize=3>미내치 5:55
<fontsize=3>1096 6:55 - 7:00
<fontsize=3>마구령 7:30
<fontsize=3>1057 8:15 - 8:25
<fontsize=3>갈곶산 966 9:20 - 9:25
<fontsize=3>늦은목이 9:45 - 10:10 - 샘터 찾다가 못찾음
<fontsize=3>선달산 1236 10:45 - 11:20 (점심식사)
<fontsize=3>박달령 12:50 - 12:55
<fontsize=3>오전약수터 13:25 (후미 15:20경)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2:50

<fontsize=3>* 8회 이승옥 선배님은 6월28일 30구간과 31구간 죽령(03:00)-박달령(24:00)를 단독산행하셨음.
오전약수터에 01:30 도착하여 나무밑 평상에서 주무신후 05:30경에 <fontsize=3>일어나셨는데
마침 지나가던 차에 태워준 두사람이 선배님을 간첩으로 의심하여 경찰소에 가자고 하였다함.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2구간 산행 (99년8월22일)

<fontsize=3>(날씨: 흐림) 박달령-구룡산-곰넘이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외 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김상열*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최재성, 정영, +(이병숙)
<fontsize=3>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세현, 권순명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부인, 성두섭, 남경희, 강준수
<fontsize=3>22회 : 이규도, 이상한, 오성학**
<fontsize=3>24회 : 전경태, 최종호, 변동원, 방천환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곽경호, 김인원
<fontsize=3>29회 : 김영선, 양승무*
<fontsize=3>36회 : 박화숭
<fontsize=3>38회 : 이태석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55명)
<fontsize=3>* 처음 나온 동문 2명
<fontsize=3>** 도래기재에서 하산, 애당리에서 보급지원 역할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20 <8월21일>
<fontsize=3>임도입구 발 6:10 (후미 6:40) <8월22일>
<fontsize=3>박달령 7:10 - 7:50
<fontsize=3>옥돌봉 8:50 - 9:00
<fontsize=3>도래기재 9:45
<fontsize=3>임도 11:10 - 11:15
<fontsize=3>구룡산 12:05 - 12:50
<fontsize=3>곰넘이재 13:40 - 13:45
<fontsize=3>애당리 동리정 14:45 (후미 17:2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00:45 <8월23일>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3구간 산행 (99년9월5일)

<fontsize=3>(날씨: 비) 곰넘이재-태백산-화방재

<fontsize=3>4회 : 최영범*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외 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박인근, 장병수
<fontsize=3>12회 : 전선길, 조영효, 장기영, 송규호, 한광덕, 이민*, 정기준*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최재성, 정영, 구현서, +(이병숙)
<fontsize=3>14회 : 장헌수, 부인, 조병찬, 김세현, 권순명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현철수, 홍기룡, 김승주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김웅배, 부인, 남경희
<fontsize=3>21회 : 이강훈, 김선욱, 김상수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이상한, 서병일
<fontsize=3>24회 : 변동원, 최경봉, 박종민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곽경호, 김인원
<fontsize=3>28회 : 최영규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66명) * 처음 나온 동문 3명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00 <9월4일>
<fontsize=3>애당리 발 5:55 <9월5일>
<fontsize=3>곰넘이재 7:05 - 7:15
<fontsize=3>신선봉 8:15 - 8:25
<fontsize=3>삼거리 9:00 - 9:10
<fontsize=3>깃대배기봉 10:35
<fontsize=3>문수봉갈림길 11:45
<fontsize=3>태백산1566 12:05
<fontsize=3>1174 13:05
<fontsize=3>화방재 13:35 (후미 14:15)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02:00 <9월6일>

<fontsize=3>* 총산우회 계룡산 산행에 많은 참석 홍보를 해주시기 바랍니다.
<fontsize=3>* 버스운행시간의 절약을 위해 사전에 코스협의를 하자는 제의가 있었습니다.
<fontsize=3>* 버스에서 보다 자세한 산행일정 안내말씀이 있었으면 하는 분들이 계십니다.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34구간 산행 (99년9월19일)

<fontsize=3>(날씨: 비, 흐림) 화방재-함백산-피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최재성, 이영복, 김명준
<fontsize=3>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세현**
<fontsize=3>15회 : 백운학*, 박병길*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여상구,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김웅배, 남경희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곽경호, 김인원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42명) * 처음 나오신 15회 2명
<fontsize=3>** 싸리재에서 하산 2명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30 <9월18일>
<fontsize=3>화방재 발 4:40 <9월19일>
<fontsize=3>1309 6:11
<fontsize=3>망향재 6:25
<fontsize=3>함백지나서 7:30 - 8:05 (아침)
<fontsize=3>은대봉1442 9:20 - 9:35
<fontsize=3>싸리재 9:50
<fontsize=3>금대봉1418 10:10 - 10:25
<fontsize=3>비단봉1379 11:35
<fontsize=3>채소밭 11:55 - 12:10 (점심)
<fontsize=3>매봉산1303 13:40
<fontsize=3>피재 13:05 (후미 14:0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19:40
<fontsize=3>
<fontsize=3>* 앞으로는 모두 램프와 여벌전지를 받드시 준비하시기 바랍니다.
<fontsize=3>* 산행전에 그날의 일정을 상세히 알려달라는 요청이 많습니다.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35구간 산행 (99년10월24일)

<fontsize=3>(날씨: 맑음) 피재-덕항산-댓재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0회 : 김일웅*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장병수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이영복, 정영
<fontsize=3>14회 : 장헌수, 조병찬, 권순명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이정용, 김웅배, 부인, 성두섭, 남경희, 신기식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오성학
<fontsize=3>24회 : 변동원, 권용술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곽경호
<fontsize=3>29회 : 이의숭
<fontsize=3>(총 44명) * 일부 산을 오르시고 지원부대 역할을 하심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30 <10월23일>
<fontsize=3>피재 발 4:55 <10월24일>
<fontsize=3>푯대봉 지나서 7:50- 8:10 (아침)
<fontsize=3>구부시령 1107 10:30
<fontsize=3>1079 지나서 11:05-11:40 (식사)
<fontsize=3>1058 전 13:20-30
<fontsize=3>큰재 14:00-15
<fontsize=3>1105(?) 15:10
<fontsize=3>댓재 15:45 (후미 16:15)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4:00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6구간 산행 (99년11월7일)

<fontsize=3>(날씨: 맑음) 댓재-두타산-이기령

<fontsize=3>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장병수, 김상열
<fontsize=3>13회 : 김진수, 박정일, 정영, 오휘명
<fontsize=3>14회 : 조병찬, 권순명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무명산악회 4인)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현철수, 홍기룡, 김승주, 이영철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김웅배, 부인, 남경희, 강준수
<fontsize=3>21회 : 김선욱, 이강훈, 성주천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오성학*
<fontsize=3>23회 : 김희준
<fontsize=3>24회 : 변동원, 권용술, 박용기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곽경호
<fontsize=3>29회 : 김영선
<fontsize=3>36회 : 박화숭, 최규석
<fontsize=3>(총 57명)
<fontsize=3>* 산행을 못했음
<fontsize=3>** 백봉령까지 산행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40 <11월6일>
<fontsize=3>댓재 발 5:15 <11월7일>
<fontsize=3>두타산 1353 7:45 - 8:15 (아침)
<fontsize=3>청옥산 1404 9:25 - 40
<fontsize=3>고적대 1354 10:35 - 10:50
<fontsize=3>갈미봉 11:55
<fontsize=3>이기령 13:00 - 13:45
<fontsize=3>이기동 착 15:00 (후미16:3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3:15


<fontsize=3>* 앞으로는 운영진들께서 모두에게 등산과정(예상 루트와 아침식사 장소,
<fontsize=3>점심식사 장소, 하산 기점등)과 하산 착점(버스대기 장소)을 정확히 사전에
<fontsize=3>알려 주어야 이번같은 사고를 방지 할 수 있다는 의견들을 들었습니다.
<fontsize=3>* 또한 참여자 분들도 최소한 조선일보사 출간 '백두대간 종주산행'에 나오는
<fontsize=3>지도와 나침반 정도는 각자가 준비하여 나오시면 좋겠다는 생각입니다.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37구간 산행 (99년11월21일)

<fontsize=3>(날씨: 맑음) 이기령-상월산-백봉령-생계령

<fontsize=3>7회 : 정재우, 주경환**, 부인, (정용순), (+1)
<fontsize=3>8회 : 이승옥
<fontsize=3>11회 : 이익효**, 정영식, 박인근**
<fontsize=3>13회 : 김진수, 최재성, 정영**, 오휘명, 김윤일
<fontsize=3>14회 : 장헌수*, 부인, 김세현**, 조병찬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현철수, 홍기룡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김웅배, 부인, 남경희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fontsize=3>24회 : 변동원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곽경호, 김인원
<fontsize=3>38회 : 이태석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44명)
<fontsize=3>* 댓재-백봉령-생계령 까지 산행
<fontsize=3>** 이기령-백봉령 까지 산행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23:45 <11월20일>
<fontsize=3>이기동 발 4:40 <11월21일>
<fontsize=3>이기령 6:05 - 6:10
<fontsize=3>상월산 910 7:00
<fontsize=3>원방재 7:30 - 7:50
<fontsize=3>백봉령 10:10 - 10:40
<fontsize=3>796 11:45
<fontsize=3>생계령 12:20
<fontsize=3>큰피원 휴게소 12:50 (13:5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3:10


<fontsize=3>* 이번에는 운영진에서 모두에게 등산과정을 미리 상세히 설명해 주셨습니다.
<fontsize=3>앞으로도 버스내에서 잘 들리게 설명해주시면 좋겠다는 의견들입니다.
<fontsize=3>** 또한번 몇몇이 길을 잃은 일이 벌어졌습니다. 이번에는 휴대폰으로
<fontsize=3>상호 연락이 되어 다행이었습니다. 독도가 가능한 분들은 반드시
<fontsize=3>지도와 나침반을 갖고 다닙시다.



서울고 동문 산우회 백두대간 제38구간 산행 (99년12월5일)

(날씨: 맑음) 생계령-석병산-삽당령

7회 : 정재우, 주경환, 부인, (정용순)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장병수, 김연우, 강응헌*
12회 : 전선길, 조영효, 장기영, 한광덕
13회 : 김진수, 정영, 이영복
14회 : 장헌수, 부인, 김세현, 조병찬, 권순명, 김영근, 부인, 김유황
<fontsize=3>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이선기
<fontsize=3>17회 : 김인응, 이정호
<fontsize=3>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fontsize=3>19회 : 권세혁
<fontsize=3>20회 : 김준호, 이선길, 부인, 이정용, 김웅배, 남경희, 강준수, 신기식
<fontsize=3>22회 : 최택상, 이규도, 오성학
<fontsize=3>23회 : 이상경*
<fontsize=3>24회 : 변동원, 최종호, 박종면
<fontsize=3>25회 : 양명륭
<fontsize=3>26회 : 김관석, 김완순, 곽경호, 정해일
<fontsize=3>36회 : 박화숭, 부인
<fontsize=3>39회 : 김상영
<fontsize=3>(총 63명) * 두사람은 처음 나오신 동문

<fontsize=3>서울 압구정 발 6:30
<fontsize=3>큰피원 발 10:20
<fontsize=3>생계령 10:45
<fontsize=3>931 11:45
<fontsize=3>908 헬기장 12:50 - 13:15 (점심)
<fontsize=3>석병산 1055 14:00 - 14:10
<fontsize=3>두리봉 14:40 - 14:45
<fontsize=3>796 11:45
<fontsize=3>삽당령 착 15:45 (16:40)
<fontsize=3>서울 압구정 착 22:3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39구간 산행 (2000년3월26일)

(날씨: 흐린후 갬) 삽당령-화란봉-닭목재

3회 : 민영선*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장병수, 박인근, 안병의**
13회 : 김진수, 이영복, 김형중**, 김종국**, 부인**, (이병숙)
14회 : 조병찬 ****장헌수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부인***,
김세환***, 부인***, 박홍권**, 박용우**, 한태수**, (조은영**)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19회 : 권세혁, 최재철, (자)최종현
20회 : 김준호, 이정용, 김웅배, 성두섭, 남경희, 강준수, 신기식, 이명인, ****이선길
21회 : 한효택
22회 : 이규도, 오성학, 이상한
24회 : 변동원, 최종호, 박용기
25회 : 양명륭
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29회 : 김영선
39회 : 김상영
(총 65명) * 닭목재-화란봉 구간 산행, ** 처음 나오신 동문
*** 처음 나온 분으로 닭목재-화란봉 구간 산행
**** 장헌수, 이선길 2인은 이후에 별도로 함

서울 압구정 발 6:50
삽당령 발 10:00
석두봉982 11:53-12:00
아래 12:05-12:40 (점심)
1006 13:45-14:00
화란봉1069 14:25-50
닭목재 15:25 (후미 15:50)
발 16:05
서울 압구정 착 21:3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1구간 산행 (2000년5월28일)

(날씨: 흐린후 갬) 대관령-선자령-노인봉-진고개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13회 : 김진수
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유황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이인*, 심영보*
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19회 : 권세혁
20회 : 김준호, 이정용, 이선길, 성두섭, 남경희, 강준수, 신기식
22회 : 이규도, 오성학, 이상한
23회 : 김희준, (장경선)
24회 : 최종호, 박종훈*, 이시열*
25회 : 양명륭**
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이우석*
29회 : 김영선
(총 46명) * 처음 나오신 동문 **7월16일 추가 산행

서울 압구정 발 23:30
대관령 발 04:25
선자령 1157 06:05
곤신봉 1127 06:50
매봉 1173 08:05
(식사 08:20-55)
소황병산 09:50-10:00
노인봉산장 식사 11:00-11:30
진고개 12:45 (후미 14:10)**
서울 논현동 18:30

** 일부 사람들이 노인봉산장에서 병내리로 잘못 하산하였음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2구간 산행 (2000년6월11일)

(날씨: 흐린후 갬) 진고개-두로봉-응복산-구룡령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12회 : 심재학*
13회 : 김진수, 최재성, 정영, 김형중
14회 : 장헌수, 조병찬, 김유황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조은영)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이인
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김정호
19회 : 최재철, (자)최종현
20회 : 김준호, 이정용, 부인***, 이선길, 부인, 성두섭, 남경희, 강준수
22회 : 이규도, 최택상
25회 : 양명륭
24회 : 최종호, 변동원
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총 50명) * 처음 나오신 동문 ** 1박 야영하신 분들
*** 구룡령 부근 일부 구간만 산행


서울 압구정 발 24:00
진고개 발 04:10
동대산 1433 05:05-15
1383 07:15-25
만월봉 1280 09:50-10:15 (아침식사)
응복산 1359 10:45
1280 11:45-55
약수산 1306 12:30-13:30 (야영하신 분들과 함께 사람들을 기다림)
구룡령 착 14:00(후미 15:45; **** 김준호,권용기,최재철,(자)최종현 도착 16:15
서울 압구정 착 22:30

**** 4인은 동대산 지나 15분 산행한 후 좌측으로 잘못 하산하여 1시간여를 헤멘 후 쫓아옴.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3구간 산행 (2000년7월9일)

(날씨: 맑음) 구룡령-갈전곡봉-조침령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장병수
12회 : 심재학
13회 : 김진수, 최재성, 정영, 박영주, 김형중
14회 :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이인, 심영보
18회 : 현철수, 홍기룡
19회 : 최재철, (자)최종현
20회 : 김준호, 이정용, 부인*, 이선길, 부인, 남경희
21회 : 한효택, 김선욱, 김상수
22회 : 이규도
25회 : 양명륭
24회 : 최종호, 변동원, 신길섭, 박종훈
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김인원
(총 51명)
* 산행에 참가 하지 않음 ** 7월14일 단독으로 산행하셨슴.


서울 압구정 발 23:30
구룡령 발 04:00
갈전곡봉 1204 5:45-6:00
헬기장 1030 8:08-8:30 (아침식사)
쇠나드리 11:00-11:05
조침령 11:50(후미 15:00) 선두휴식후 12:45 출발
서림 13:45 (후미 15:20 차량 이용 도착) 16:10 출발
서울 압구정 착 23:5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0구간 산행 (2000년7월23일)

(날씨: 흐림) 대관령-고루포기산-닭목재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1회 : 정영식
13회 : 김진수, 최재성, 정영, 이영복, 오휘명, 김윤일, 김석길, 강태흥, 허병훈,
유지한*, 김경모*, 이만영*, 최성일*, (미스 홍*)
14회 :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부인, 최치석, 한태수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20회 : 김준호, 이정용, 부인**, 이선길, 남경희, 성두섭
22회 : 이규도
25회 : 양명륭
24회 : 최종호, 변동원, 박종훈
26회 : 김관석, 권용기, 정해일, 자녀3**
29회 : 양승무
(총 53명)
* 처음 나온 사람 ** 산행 않음

서울 압구정 발 0:10
대관령 발 4:40
능경봉 1123 5:25
고루포기산 1238 7:20-7:25
닭목재 9:15(후미 10:00)
옥계 횟집 11:40-13:20(점심식사)
서울압구정 착 18:30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4구간 산행 (2000년8월20일)

(날씨: 하루종일 비) 조침령-단목령-점봉산-한계령

7회 : 정재우#, 부인, (정용순, 이경자)
8회 : 이승옥#
10회 : 김일웅*, 유듀환*, 김춘길*
11회 : 정영식, 이익효#, 홍석의, 안병의**[체력소진]
13회 : 김진수, 정영
14회 : 장헌수, 조병찬
16회 : 김승남, 부인, 김종교, 박영철,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이인
18회 : 현철수$, 홍기룡$, 여상구
20회 : 김준호, 이정용, 부인*, 이선길, 남경희, 성두섭, 강준수***
22회 : 이규도, 최택상, 오성학
25회 : 양명륭$
24회 : 최종호, 변동원**, 윤성원, 서재영, 박종훈, 박기설***[인대부상]
26회 : 김관석, 김완순***, 권용기, 정해일,
29회 : 양승무, 김영선$
(총 51명 - 산행 47명)
# 금요일 저녁 출발하여 단목령까지 산행 후 주전골 숙박후 다시 올라와 산행
$ 토요일 아침 출발하여 단목령까지 산행 후 남쪽 25분거리 삼거리에서 숙박 후 산행
* 산행 않음 ** 점봉산아래서 오색으로 하산 *** 단목령에서 오색초등교로 하산

서울 압구정 발 0:00
진동리 착 5:45
조침령 750 6:00 - 6:05
1136봉 8:45
단목령 9:45 - 10:20 (식사)
점봉산 1424 11:30 - 12:45 (휴식)
망대암산 1236 착 13:15
점봉산 입구 착 16:10 * 1157봉 부근에서 길을 잃어 20여분을 허비
한계령 905 착 16:20(후미 17:40) - 18:00
서울 압구정 착 0:30

* 1175봉 부근에서 기록자를 포함해 여러 사람들이 길을 잃었음.
길을 가로 막은 통나무를 넘어가지 말고 북쪽(우측)의 리본표지를 따라 하산해야 함.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5,46구간 산행 (2000년9월2,3일)

(날씨: 흐림. 9월3일 새벽에 비, 흐리다가 갬)

A팀(45-46구간) 한계령-대청봉-마등령-설악동[2일밤 서울 출발 무박; 15명]
A'팀(45-46구간) 한계령-대청봉-1박-마등령-설악동[B팀과 동행; 18명]
B팀(45-47구간) 한계령-대청봉-1박(중청,희운각)-황철봉-미시령[2일 서울 출발 1박; 16명]
B'팀(45-47구간) 한계령-대청봉-1박(마등령)-황철봉-미시령[2일오전 한계령 출발 1박; 8명]
C팀(45구간) 한계령-대청봉-1박-천불동-설악동[B팀과 동행; 17명]

3회 : 민영선[A팀과 동행; 설악동-천불동]
7회 : 정재우B', 부인B', 주경환A', (정용순B, 이경자A')
8회 : 이승옥B'
10회 : 김문현*B, 유두환A', 김춘길A'
11회 : 정영식B, 이익효B', 홍석의B, 박인근B, 이상현B
12회 : 전선길c, 조영효c, 한광덕c, 송규호c, 심재학c, 신경호*c
13회 : 김진수A, 정영A', 구현서A', 박영주A', 박용웅A', 노준규*A', (+2A')
14회 : 장헌수B', 부인A', 조병찬B
16회 : 김승남A', 부인A', 김종교B, 박영철B, 최치석A
17회 : 김인응A, 이정호A, 정우택A, 이인A'
18회 : 현철수B', 홍기룡A, 김승주B', 이영철B', 윤병철A', 부인A', 최승규A'
19회 : 권세혁A, 최재철c, [자]최종현c, 성항경c*
20회 : 김준호A, 이정용A, 이선길A, 부인A, 남경희A, 성두섭B
22회 : 이규도B, 최택상A, 이상한c, 송경헌A, 박우규*A
23회 : 김희준c, (장경신c, 변영일c)
24회 : 최종호B, 변동원c, 윤성원c, 박종훈B, 이병해B
25회 : 양명륭B
26회 : 김관석c, 김완순B
29회 : 김영선c
(총 75명) * 처음 나온 5명

A(무박)팀(남경희 기록)

B(1박)팀(김종교 기록)

B'(2박)팀(장헌수 기록)


9월2일 서울 21:009월3일 한계령 1:40서북주릉안부 3:15끝청 5:50-6:10중청 6:40대청1707 7:00희운각 8:30-8:501275봉 11:05-11:30마등령 13:10-13:55비선대 16:15설악동 17:00(후미 18:10)
9월2일 서울 7:00한계령12:00서북주릉안부 13:30중청 16:05대청1707 16:20희운각 17:30(후미 19:30)9월3일 희운각 6:451275봉 8:45-8:55마등령 10:15-10:30저항령 14:00-14:15황철봉 15:00-15:05미시령 17:30(후미 20:15) 오색숙박9월2일 한계령 7:10서북주릉안부 8:45중청 11:45-12:05희운각 13:00-14:001275봉 15:25-15:35마등령 18:15(후미 19:00)9월3일 마등령 7:40저항령 10:30-11:00황철봉 11:50미시령 14:00(후미 15:30)
 


* 미시령 휴게소에서 버스 2대 20:00 출발, 1대 20시40분 출발, 서울 23:55 거의 동시도착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7구간 산행 (2000년9월17일)

(날씨: 새벽에는 강풍과 비, 오후에는 갬) 미시령-황철봉-마등령

10회 : 김춘길
12회 : 송규호, 심재학
13회 : 김진수, 최재성, 김형중
16회 : 김승남, 부인, 최치석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18회 : 홍기룡, 여상구
20회 : 김준호, 이정용, 이선길, 남경희, 강준수*
22회 : 최택상
24회 : 변동원
25회 : 양명륭***
26회 : 김관석, 권용기, 곽경호*
28회 : 최영규, 한만엽**
29회 : 김영선

(총 28명)
* 2명은 저항령에서 길골로 하산
** 처음나온 동문

서울 압구정 발 20:30 (9월16일)
미시령765 4:00 - 5:10 * 극심한 강풍이 불었슴.
1318봉 6:55-7:05
황철봉1381 7:55-8:10
저항령 8:50 - 9:15 (식사)
마등령 12:05
(오세암-백담사 경유, 중간에 식사)
용대리 17:00 (후미 18:00) - 18:20
서울 압구정 착 21:50

*** 양명륭 동문이 산행 안내를 위해 47구간을 다시 참가했슴.




서울고 동문산우회 백두대간 제48구간 산행 (2000년10월1일)

(날씨: 흐리다가 갬) 미시령-마산-진부령

[노우트] 아래에서 ; 다음은 미시령-마산-흘리초등학교까지만 산행한 사람
7회 : 정재우*, 부인, 주경환, (정용순) ; (이경자)
8회 : 이승옥*, 조용삼** ;
10회 : 김문현, 김명렬** ; 김춘길, 안승우, 오만준
11회 : 이익효*, 정영식, 홍석의 ; 박인근, 장병수, 박인철, 최승렬
12회 : 조영효 ; 전선길, 송규호, 신경호, 한광덕, 심재학, 이민
13회 : 김진수, 정영 ; 김형중, 구현서, 김윤일, 박영주, 노준규, 부인, 최재성***
14회 : 조병찬, 김유황, 장헌수* ; 부인
16회 : 김승남, 부인, 박영철, 부인, 최치석, 김종교 ; 이선기, (김진태), (문혜순)
17회 : 김인응, 이정호, 정우택, 이영섭, 이인 ; 임창서**, 전태원**, 엄태석**, 하영환**
18회 : 현철수, 홍기룡, 윤병철 ; 김정호, 최승규, 김동헌**, 부인**, 여상구***
19회 : 최재철, 최종현 ; 권세혁, 김영택
20회 : 김준호, 이정용, 이선길, 남경희, 성두섭 ; 김웅배, 이선길 부인, 강준수,박승훈, 김형철**
21회 : ; 한효택***, 김선욱***
22회 : 최택상, 이규도, 송경헌 ; 오성학, 이상한, 김진호
24회 : ; 김희준, (장경신)
24회 : 최종호, 김종헌, 박종훈 ; 황우성**, 이세용**, 변동원***
25회 : 양명륭
26회 : 김관석, 정해일, 김인원 ; 김완순, 곽경호, 권용기***
28회 : ; 최영규, 한만엽
29회 : ; 김영선
35회 : ; 박종원
36회 : ; 박화승, 장병권**, 주대오**
37회 ; ; 최대성
39회 : 김상영 ; 오호근
51회 : ; 정보영**
(총 115명)
* 9월30일 답사 산행하신 분, ** 처음나온 동문 14명
*** 산우회 임원으로서 행사관계로 흘리초등학교-마산 구간만 산행한 사람

서울 압구정 발 23:30 (9월30일)
미시령725 3:30 - 6:00 (식사)
상봉 6:55 - 7:05
신선봉1204 7:55 - 8:10
대간령 642 8:50 - 9:15
마산 1051 10:05 - 11:00 (식사)
진부령529 12:25 - 13:45
흘리초등학교 13:50 - 17:05 (백두대간 남한구간 종주 종료 기념행사)
서울 압구정 착 0:40 (10월2일)

 

 

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 종주

이익효(11회: 산우회 고문; 백두대간종주 시작시 산우회 회장)

내가 이 글을 쓰면서 먼저 밝혀야 할 것은 우리의 백두대간 행사는 조국의 국토를 옳게 인식한다던가 통일조국의 미래를 준비한다던가 하는 관념적이고 애매한 동기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이번 행사는 단순히 고교동문 등산회에서 기획한 등산에 주 목적을 둔 백두대간 종주였다는 것이다.

따라서 서울고 산우회의 백두대간종주는 계획부터가 거창하지 않았고 몇몇 선후배의 제의에 의해 시작되었다 하겠다. 1996년 7회 정재우선배로부터 서울고 총산우회에서 백두대간을 시도해 보자는 제안이 있었는데, 이것이 동기가 되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그해 킬리만자로 등반 계획이 이미 잡혀 있어 백두대간 계획은 구체적으로 생각할 수 없는 처지였다. 그러던 차 정선배로부터 당신 자신도 킬리만자로 산행에 참가할 것이며, 그때 구체적인 백두대간 종주계획을 갖고 참석하겠다는 의사를 전해왔다. 그때 내 느낌은 정선배의 의지가 여간 굳은 게 아니어서 좀처럼 포기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그런 의지를 접하면서 백두대간 종주야말로 한번 해 볼만한 행사가 아닌가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종주 실행을 위해 해결해야할 문제들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보게 되었다.

첫째가 등산에 따른 기술적인 사항이었다. 후에는 정선배님(후에 백두대간 단장)을 비롯해서 전문가 이상의 등산지식과 열성을 가진 회원들이 많아 전혀 문제되지 않았지만, 계획 당시로서는 가장 우려되는 사항이었다. 그런데 서울고 산우회 내에는 이미 13-14회를 중심으로 몇 기에 걸쳐 가끔 모이는 산행 그룹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그룹에는 당시 전체 산우회의 중심 기수가 다수 포함되어 있었는데, 이번 킬리만자로 등정행사에 여러 명이 참가한다고 했다. 만약 이들이 백두대간 행사의 주력이 되어 준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는 생각에서 14회 장헌수동문에게 접근해 보았다.

나는 킬리만자로 등정 예비모임 장소인 만강홍에 나아가 내가 몇 회 아무개인데 현 산우회장이라 소개하면서 이번 여행에 많은 협조를 부탁한다고 하였다. 결과는 기대 이상이었으며, 우리는 등정기간 중 늘 의기투합한 선후배로 킬리만자로 등반을 끝낼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이어서 진행된 백두대간종주에서도 역시 그들은 중심 역할을 잘 해주었고 공헌이 지대하였다.

다음 문제는 비용이었다. 나의 소극적 의견으로는 평균 15-20명 정도의 행사가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적을 때에는 개인 소유의 봉고차를 쓰기로 하고, 많을 때는 버스를 빌린다 해도 3년간 이래 저래 약 2천만원의 비용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이 2천만원의 비용은 어떻게 하던 자체적으로 해결할 생각이었다.

초대 산우회장이 김문현선배의 주장이 늘 남의 도움을 가급적 받지 않는 것을 서울고 산우회의 전통으로 하자는 말씀에 나도 전적으로 동감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3년간 2천만원을 마련한다는 것이 쉬울 것 같지는 않았으나, 그것 때문에 계획을 못 세울 정도는 아니었다. 시행키로 하고 날짜를 정했다.

세상에 무슨 일을 하다보면 생각대로 되는 일이 거의 없는 법인데, 이번 경우에도 예외는 아니어서 첫날부터 우선 참석 인원 규모부터가 예상 밖이었다. 첫날 참석 인원은 58명. 결과적으로 대간종주는 예상보다 엄청나게 커진 행사가 되었다. 매번의 대간 종주에 예상보다 2-3배의 인원이 참석하여 시종 진행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진행 도중 어찌 된 일인지 비용은 전혀 문제가 되지 않았다. 회원 중 개인적인 찬조금을 내는 회원도 있었고, 총동창회에서도 우리 산우회 행사를 높이 평가해서 많은 도움을 주었으나, 무엇보다 좋았던 것은 교통비를 포함한 직접 경비를 회원들이 十匙一飯으로 자발적으로 해결해 주었던 것이다. 첫날부터 너무나도 감사한, 기대 이상의 산행이 진행되었다.

첫 구간 1박 2일의 지리산 종주코스 참석 인원 58명.

버스 2대의 발대식 겸 첫 산행이 시작되었다. 새벽 천왕봉에 도착하자 24회 최종호 동문이 누구라는 대상도 없이 온 천지의 햄들에게 외치는 "여기는 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팀의 천왕봉 정상 등정"을 알리는 외침은 바로 우리들 산행의 성공을 선언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1박 2일의 지리산 종주는 처음 만나는 동문들이 많았던 당시 상황에서 동문 산우들의 만남을 반가워하고 서로를 격려하는데 더 할 수 없이 좋은 기회를 만들어 주었다.

첫날 고된 산행 끝에 저녁시간이었다. 처음 보는 18회 현철수동문이 슬며시 다가와 자기는 백두대간을 한 번도 빠지지 않고 다 하겠노라고 했다. 나에게는 그 이상 더 없는 격려였으며, 이틀째 산행이 끝날 무렵 전날 참석치 못했던 10회 김일웅, 지경득 두 동문께서 시루떡 반 말을 나눠지고 올라왔을 때 동문 간에 느끼는 감정은 그리 흔하게 느껴지는 감정은 아니었을 것이다.

시작과 동시에 질서가 서서히 잡혀갔다. 단원들의 마음은 같은 방향으로 뭉쳐지고 있었고, 자기가 할 일을 잘 알고 있었다. 물론 백두대간 산행 도중 어려움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처음 시작할 때부터 모든 단원들의 실력이 고르지는 못했다. 산행에 별로 경험이 많지 않았던 회원들이 힘들어 하는 것은 당연했고, 후배들과 똑같이 해야 하는 연로한 선배들의 문제는 체력의 열세였을 것이다.

한 여름의 고된 산행으로 식욕을 잃고 물만 마시며 10여 시간을 버텨야 한다던가, 주말 산행을 마치고 출근하면 눈의 부을 정도로 과로를 느낀다던가 하는, 각자가 느끼는 어려움은 주위의 누구에게도 하소연할 수 없는 자업자득의 결과였다.

선두그룹과 후미그룹이 저절로 형성되면서 누가 시키지 않아도 후미를 책임지는 단원이 생기고 실력에 따라 자기의 등산계획을 잡아나갔다.

정재우단장님과 장헌수대장의 헌신적인 봉사, 난관이 예측되는 구간마다 답사를 위해서 두 번씩 산행을 해야 하는 그분들의 격무 덕에 회원들은 아무 걱정 없이 산행만 하면 되었다.

대회 참석인원부터 버스 대절 비용 염출에까지 치밀한 계획으로 거의 허점을 보이지 않은 최치석동문. 또 그의 유머와 선후배 대원을 감싸는 너그러움.

발군의 등산 실력으로 동문들의 산행 안전을 늘 걱정해주던 김진수동문.

의무감답게 정상주를 늘 챙기던 김승남동문.

헌병감임을 자처했으나 전체 분위기를 살리려고 헌신적이었던 김종교동문.

자신의 보이지 않는 헌신에도 불구하고 선배들로부터 전혀 오해를 받아 왕따를 당하고 있음을 못내 섭섭해 하던 김완순동문 등.

수호지에 나오는 백팔두령을 방불케 하는 각양 각색의 인물들이 벌이는 실제 연기는 생각만 해도 즐거운 추억이다. 등산이 끝날 무렵 동문들의 산행 실력은 평준화되었고, 전 대원들의 등산실력, 등산예절 등 모든 면에서 수준급이 되었다고 나는 감히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나 자신도 백두대간을 하는 과정에서 여러가지를 얻었다. 우선 산행 실력이 늘었다. 우연히도 백두대간 3년 기간 전후에 일본 알프스라 일컫는 3200미터 급 槍岳과 穗高岳을 종주할 기회가 있었다. 8년 전 등산했던 때 어려움을 겪었던 기억에 비추어 볼 때, 2000년 9월 초의 산행에서는 시간도 단축되었고, 별로 어려움 없이 등산을 끝낼 수 있었으니 실력이 향상된 것이리라.

다음으로 등산에 대해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되었다. 등산은 체력을 연마하는 단순한 스포츠 이상이다. 그것은 정신적인 고양감과 동반자들과의 유대감을 깊게 해주기도 한다. 스포츠라 하더라도, 단연 최고의 스포츠임에 틀림이 없다.

마지막으로 동창들에 대한 인식이 변했다. 고등학교 동창은 사회에서 얻을 수 있는 인간관계들 중에서는 단연 으뜸이다.

백두대간 종주를 하는 3년 간의 내 생활은 평소 좀처럼 느껴보지 못한 협동과 일체감과 정기적으로 느끼는 흥분과 기쁨의 연속이었다.

그리고 내가 늘 갖기를 원하는 또 다른 방을 하나 더 얻은 것 같다.

백두대간 전 대원의 노고와 성취에 축하를 드린다.

또한 동창회의 전폭적인 지원에 감사드린다.

서울고등학교 백두대간팀 만세!

 

 

백두대간 1, 2 구간: 지리산 천왕봉-노고단

(하룻강아지)

1997년 9월 5일-6일

이선길(20회)

93년 7월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그해 10월부터 산에 오르기 시작했다. 여태까지 겪지 못했던 일들이 나에겐 너무 어려웠고 내 마음대로 결정이 안 되었다. 복잡한 머리를 식히려 북한산에 올랐다. 힘이 드는 시간, 걱정거리가 잊혀지고 물과 나무가 위로해주며 정상에 오르면 마음이 안정됨을 느꼈다. 내려와선 느껴보지 못했던 막걸리 맛에 나는 바로 산에 재미를 붙였다.

그래서 나는 94년 70번 산에 올랐다. 혼자 가고, W군하고 가고... 북한산 42번, 관악산 12번, 도봉산 6번, 명지산 2번 등등... 구기동 파출소에서 대남문까지 세 번 쉬다가 두 번, 한 번, 나중에는 쉬지 않고, 이제는 시간 단축이다. 1시간 11분이 내 기록이다.

月刊 {山}을 보면서, S군을 따라다니면서, 새로운 코스를 다니기 시작했다. 자연스럽게 릿찌를 타게 되고, 향로봉, 염초봉, 만경대를 경험하면서 짜릿한 재미를 느꼈다. 새로운 코스를 내려오면 그 동네 싸고 맛있는 집을 찾게 되었고, 기억해 두었다.

95년 9월 16일 토요일 나는 친구 셋과 함께 북한산 12성문을 완주했다. 그 후 새로운 코스를 알고 맛있는 집을 알고 릿찌를 알고 나는 자신이 생겼다. 친구들과 만나면 나는 산 얘기만 했고 같이 가자고 졸라댔다. 산에 오른지 만 2년만 이다. 그전에는 산에 가자면, "미쳤냐? 돈 생기냐? 그 시간에 술 마신다"하던 나였다. 그러던 내가 북한산 좀 갔다해서 건방을 떠니 친구들 눈에 얼마나 가소로웠을까?

95년 1월 12일 목요일 혼자 대서문에서 의상능선을 지나 대남문에 이르렀을 때 가느다란 눈이 내렸다. 때마침 W군의 술 전화가 왔다. 상계동까지 가야 하므로 대성문을 택했다. 술이 급하고 길이 좋으니 내걸음은 경보 수준이었다. 해는 기울었지만 나는 여러 번 다니던 길이기 때문에 랄랄라 내려갔다. 일선사 바로 전에 고속도로 같이 넓은 길에, 얼음 위에 가랑눈이 덮일 듯 말 듯 눈에 들어오는 순간, 경사가 없다고 느끼는 순간, 조심할까 말까 하는 순간 나의 왼쪽 발은 이미 그 위를 밟고 있었다. 미끌, 아차하며 오른 발에 힘을 주어 앞의 나무를 잡으려 점프를 했다. 그러나 오른 발은 마찰력을 잃고 찌익 미끄러지는 것이다. '죽는구나!' 하면서 5m를 떨어졌다. (나중에 확인 사항) 의식을 잃었는지 나는 머리를 감싸고 웅크리고 앉아있는 상태였다. 심한 갈증을 느꼈다.

다른 이야기. 나는 어렸을 때 노량진 본동에 살았다. 9평 균등 분할 주거지역이었는데 그곳이 새 동네였다. 왜냐하면 한강변 어로로 생계를 유지하던 사람을 홍수의 위험 때문에 집단 이주시키면서 새로이 만든 주거지역이기 때문이었다. 집 뒤에는 꽤 깊은 하천이 흐르는데 비만 오면 변 냄새, 쓰레기 냄새가 심했다. 그 당시 청소 방법은 유일하게 장마 때인 것이다. 아버지는 내 집 뒤가 막히면 안되기 때문에 (그전에 아버지와 엄마가 늘상 하던 일) 다 큰 장남인 나에게 그 어마어마한 일을 맡기신다. 장화신고 용감히 내려선 나는 아버지 시키는 대로 쓰레기를 아래로 내려보낸다. 내 짧은 생각에 큰 돌이 쓰레기를 엉키게 하는구나 생각 들면서 아버지 허락 없이 그 돌을 들었다. 웬걸 엄청나게 무거우며 미끌거린다. 그러면서 나의 오른손 엄지 손가락은 큰 돌과 큰 돌 사이에 짖이겨졌다. 의식을 잃었는지 아닌지 몰라도 나는 마루에 누워있었고 엄마한테 물을 달라고 했다.

배낭에 있는 물을 꺼내려 하는데 몸이 움직이질 않는다. "큰일 났구나, 어떻게 해야지." 날은 깜깜하고 대책을 생각하고 있는데 잠시 후에 "괜찮아요?"하는 소리가 들린다. 그리고 그들은 내려왔다. 그들은 나를 구출한 것이다. 양 어깨에 의지하며 내려오는데 평창 매표소가 왜 그리 멀던지....배낭이 등을 쳤는지 등뼈가 제일 아프다. 매표소에서 큰길까지 왜 그리 계단은 많은 건지... 큰길에 오자 그들은 병원에 가라고 하며 나를 보내려한다. 나는 소주를 대접하겠노라 우기며 갈비집에 들어갔다. (나는 대학교 2학년 때 운전면허를 따놓고 수많은 음주사고를 일으켰다. 그래서 나는 타박상에 자신이 생겼고 갈비뼈는 부러져도 저절로 붙는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들 5인은 자신들을 정릉 토박이라고 소개하면서, 운동화 신고 정릉에서 한잔하다 산에 올랐다고 말하면서 즐겁게 소주를 마신다. 나는 아직 온몸이 쑤시며 부러진 데는 없는 것 같으나 등뼈가 아프다. 그래서 나는 술이 내키지 않아 대충 끝내고 택시를 타고 집에 왔다. 집에 와서 씻지도 않고 자버렸는데 다음날 아침 아무 일도 없었다.

95년 3월 21일 화요일 월간 {산}에 소개된 백화사 가사당 암문을 답사키로 하고 나섰다. 백화사를 끼고 왼쪽으로 가야하는데 오른쪽을 올랐다. 능선을 중간쯤 올랐을까 갑자기 소총소리가 들린다. 나는 군부대 사격장 능선을 오르고 있는 것이었다. 유탄에 맞을까 두려움에 사력을 다해 뛰었다. 한 능선을 다 오르니 통행금지(군사지역) 낡은 표지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럭저럭 시간 많고 큰일은 해결 안되고, 열심히 산을 올랐다. 96년에는 입산회 회장을 맡으며 더욱 열과 성을 다했다.

96년 3월 2일 토요일 나는 W군과 J군과 함께 논남기로 갔다. 논남이 종점 민박은 나의 가장 편안한 쉼터이다. 노부부가 나를 항상 따뜻하게 맞아준다. 그 집 노인은 6·25때 논남기 학살을 이야기 하곤 했다. 북에서 내려올 때 반드시 지나가는 길이 강씨봉 귀목고개라 한다. 그 노인은 나하고 여러 번 술자리를 같이 했는데 지금은 고인이 됐다. 그 집 안주인은 내가 하루 묵고 가면 수정된 달걀을 스무개씩 건네 주곤 했다. 닭백숙을 죽과 함께 배부르게 먹고 자고 나니 아침에 온 세상이 하얗게 눈이 내렸다. 논남기, 명지산, 2봉, 3봉, 귀목고개 논남기가 계획된 코스인데 그 당시 논남기 명지산 직코스는 잘 알려져 있지 않았다. 나는 그전에 월간 {산} 개척코스 소개로 명지산에서 논남기로 내려온 적이 있다. 하지만 지금은 눈이 많이 내려 길이 없어지지 않았는가?

만장일치로 산에 올랐지만 도무지 어디가 어딘지 모르겠다. 능선, 능선만 되뇌이며 한참 헤매는데 저만치 사람이 보인다. 60대 중반 머리가 허연 노신사였다. 노신사도 명지산을 오르고 있었다. 우리는 함께 하기로 하고 오르는데 산이 높아질수록 눈이 깊어지며 경사는 더욱 가파르고 포기해야할 지경이다. 그러나 W군은 자신있어 보인다. 그의 동물적 감각은 내 일찍 경험했던 바 우리는 그냥 그를 따르기로 했다. 한참 후에 우리는 명지산에 올랐다. 길을 따라 온 것이 아니라 없는 길은 만들어 오른 것이다. 다시 논남기에 도착하니 8시간 30분 후였다. 그 노신사는 고맙다는 인사 한마디로 자기 차를 타고 가버렸는데 나는 아직도 그 노신사와 우리의 산행에 대해 이해를 할 수가 없다.

97년 9월 5일 하룻강아지는 백두대간이 무엇인지 모른 채 중산리로 떠났다. 큰 배낭에 속옷, 양말, 남방, 바지, 방한복 챙기고 버너, 랜턴, 깡통, 술 거기다가 C-Ration까지... 지금 나는 북한산에 갈 때 7-8kg의 배낭을 지는 것을 감안할 때 15kg 이상은 됐을 것이다. 나는 큰 배낭을 두 번째 갖고 갔는데 첫 번째는 94년 12월 17-18일 사명산 갈 때였다. 5명이 가면서 나는 나 혼자 취사도구, 음식을 준비했다. 그러나 나는 그 배낭을 1 시간 밖에 질 수 없었고 L군이 대신 짊어졌다.

미안하지만 하룻강아지는 지리산이 두 번째인데 첫 번째는 95년 11월 5일 성삼재 임걸령 피아골 코스였다. 그러니 천왕봉을 몰라도 한참 모르며 백두대간에 참여한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얼마 못 가서 왼쪽 무릎 부근 근육에 이상이 생겼다. 배낭 무게, 보폭, 호흡, 주행법 아무 것도 몰랐으니(지금도 모르지만) 당연한 결과였다.

몇 시간 늦은지도 모르고 정상에 오르니 모두들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단체촬영하고 기진 맥진, 기다려준 선후배가 고마운지 뭔지 모른 채 나는 암담했다. 벌써 망가졌으니 장차 이를 어쩌랴!

고민할 시간도 없이 선두는 출발하고 나는 따라가야만 했다. 뒤 따라 가는데 나는 자꾸만 쳐진다. 쳐지고 쳐지고 앞사람은 보이지도 않는데, 이게 웬일이냐? 평지를 갈 때는 다리가 아프지가 않은 것이다. 아! 이게 오를 때, 내릴 때, 평지를 걸을 때 다른 근육이 움직이는구나! 나는 알아채린 것이다. 그렇다면 평지는 빨리, 오르내릴 땐 쉬엄쉬엄, 스틱, 무릎보호대 온갖 수단과 방법으로 나는 따라갔다.

점심을 어떻게 먹었는지 기억도 안 나며 중간에 L군이 버너와 깡통 2개를 자기 배낭에 옮긴 것만 기억난다. 벽소령에 가서야 나는 이성을 찾을 수가 있었다. 술 좀 마시니 마음이 편해진다.

아침에 일어나니 다리가 괜찮은 것 같다. 아침 산이 이렇게 상쾌할 수가 없다. 산중에서 자보기는 처음이 아닌가? 그것도 지리산에서. 다시 행군은 시작되고 1시간도 안돼 다리는 다시 아파 온다. 어제보다 더 아프다. '평지는 빨리' 수법도 안 통한다. 결국 S군이 내 배낭을 짊어진다. 연하천이다. 이렇게 고마울 수가. 그리하여 하룻강아지는 무사히 백두대간 1, 2차 지리산을 완주한 것이다. 내가 완주한 것을 축하하려 K선배 J선배가 떡을 준비하셨다. 떡이며 막걸리며 그렇게 맛있을 수가 있을까?

나는 아직도 지리산, 설악산 얘기를 하면 못 알아 듣는다. 아직 몇 번 안 가봤기 때문에 지명을 모른다. 남들은 어디서 어디로 어디까지 하면 응! 하며 알아듣는데, 나는 지명을 기억했다가 집에 와서 지도를 펴들고 다시 복습해야 이해가 간다. 그리고는 몇km인지 고도는 어떤지 공부를 해야한다. 그래서 나는 아직 하룻 강아지인 것이다.

백두대간에서 나는 왜 우리가 가깝게 친해지는지를 알게 됐다. S형의 장딴지, J형의 끈기, H형의 아량, N군의 과묵, I형의 노련, T군의 겸손을 나는 배우려 한다.

 

 

백두대간 11구간: 신풍령-덕산재

1998년 3월 22일

김종교(16회)

동문 산우회 최치석 부회장 덕에 어렵사리 산을 익혀 3년만에 100개의 산을 답파하고, 산행에 자신이 생길 무렵부터 백두대간 마루금을 가르는 꿈을 갖기 시작했다. 여러 편의 백두대간 단독 종주기를 읽어도 보고, 또 지도도 구입하는 등 나름대로 준비를 하였으나 쉽게 행동으로 옮겨지지가 않았다. 그렇게 차일피일 미루어 오던 중 1997년 9월 5일 서울고 동문 산우회 57명의 일원으로 중산리를 출발, 백두를 향하는 대간 길을 오르기 시작하였다. 나도 대간 이어 달리기에 합류하는 소원을 이루게 된 것이다.

드디어 태백 준령의 힘찬 정기를 받아 동문간의 끈끈한 정을 온 몸으로 느끼며 어둠을 뚫고 백두대간 마루금을 지르 밟기 시작한 것이었다. 얼마나 기다렸던 시작인가? 여기 천황봉을 오르며 감회에 젖어 쓴 글이 있어 옮겨 본다.

먼 옛날, 아주 먼 옛날부터

열린 하늘 밑에 천황봉은 있었고

산이 있어 산에 오르듯

천황봉이 있어 천황봉을 향해 오른다.

조금 남은 달빛 벗삼아

산죽은 계절 없이 우릴 반기고,

무덤 속 어르신들 자주 만나네.

길 오름 그 허리에

로타리 산장 옆 감로수는

왜 그리도 차고 시원한 지.

너덜을 올곧은 마음으로 오르지만

바윗길, 목까지 숨찬 가슴에

중산리에 두고 온 사람이 부럽구나.

하지만 그녀가 앞을 걷는

환상 쫓다 천황봉에 오르다.

우리 오름을 알리는 햄의 메아리가

노고단을 넘어 백두로 백두로……

지리산 천황봉은 남쪽 대간 마루금 중 가장 높은 봉우리다. 전에도 보았던 같은 봉우리인데 예전과 다름은 대간의 시작이며 진부령까지 이어질 기나긴 산길에 대한 도전의 열정이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노고단까지 훤히 보이는 쾌청한 날씨는 힘든 오르막의 고통도 앞으로 걸어야 할 대간 길의 고통도 잊게 하는 것이었다.

지금은 10여 시간의 산행도 참으며 거뜬히 마칠 수 있지만, 등산 초기에는 90㎏이나 되는 내 몸무게를 가지고 8시간이 넘는 산행은 힘든 것이었다. 1000m가 넘는 3개의 봉우리가 있는 신풍령(빼재)구간은 심한 고통을 가져다주었고, 이는 충분히 잊혀지지 않는 곳으로 각인 되어 산행기를 쓰게 된 결정적인 동기가 되었다.

1998년 3월 22일 오전 6시 25분, 9·10번 구간인 덕유산 종주 구간은 동절기 산행엔 위험이 따를지 몰라 뒤로 미루고 우리 54명 산우회원들은 신풍령 구간을 먼저 등반하기로 결정하여 신풍령(해발 930m) 휴게소를 출발하였다. 날씨는 맑았고, 바람도 거의 없는 편이었다. 신풍령 도로 오른 쪽으로 난 급경사 등산로를 5분 정도 오르니, 대간 주 능선에 닿았다. 잡목을 헤치며 35분 정도 가니 되세미기재가 나오고 좌측으로 크게 휜 대간 길에는 어린 진달래 가지와 기 큰 싸리나무가 우리들의 뺨을 때리고 옷가지를 잡으며 보행을 막는다. 이 길을 벗어나 우측으로 난 대간 길을 약간 내려서면 호절골재에 닿는다. 호절골재에서 삼봉산이 훤히 보여 35분 정도 힘차게 정상에 오르니 덕유산의 장엄한 능선이 시야에 크게 와 닿는다. (두 번째 봉우리에 덕유 삼봉산 정상 포지석이 있다.) 정상에는 먼저 오른 일행들이 사진 촬영도 하고, 간식도 먹으며, 잠시 휴식을 취하고 있었다.

여기서 보는 덕유산은 깃대봉에서 바라보았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저 장엄한 봉우리와 마루금을 과연 완주할 수 있을까 걱정이다. 이름이 삼봉산이라 봉우리가 3개인 줄 알았으나, 올라와 보니 다섯 개 정도는 되는 것 같았다. 암반 지역을 지나 우측 급사면으로 해서 하산을 시작하였다. 하산 길은 북사면이어서 삼월 하순의 잔설이 30㎝정도 쌓여 있었고, 또한 급한 내리막길이라 몹시 위험하였다. 해발 450m를 내려오는데 1시간 15분이나 소요될 정도였으니, 무릎과 허벅지에 무리가 오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밭 가운데 서서 내려온 길을 되돌아 바라보니, 등산로는 이미 보이지 않고, 암반으로 절벽을 이룬 삼봉산의 웅장한 자태만이 남성다운 씩씩함을 자랑하고 있었다. 후에 21구간인 대야산 후면 수직 벽은 더욱 놀라웠지만 삼봉산 암벽도 당시로서는 경외감을 느낄 만했다.

해발 690m에 위치한 소사재 매점에서 휴식을 취하며, 앞으로 오를 삼도봉과 대덕산(1290m)을 바라보니, 그 높이가 만만치 않아 보인다. 이미 3시간 반을 소모한 체력으로 어떻게 오를 지가 걱정이었다. 매점 건너편 오른쪽 절개지를 넘어 대간 길이 이어져 있었다. 걷는 길 옆 양지쪽으로 무덤들이 가지런히 모여 있었다. 보낸 이들은 엊그제만 같을진데, 난 무심히 이들을 지나, 개간중인 천여 평 밭 위를 타고 임도로 내려섰다. 고랭지 채소밭을 갈고 있는 농부들과 눈인사를 주고받는데 표정이 그렇게 따스할 수가 없다. 마음이 갑자기 부자가 된 듯 하다. 잠시 후 오른 쪽으로 급경사면이 나타났고 고행 길이 시작되었다. 선두 그룹은 이미 모두 삼도봉을 향해 떠나가 버렸고, 후미를 보는 몇몇 전사들만이 저 밑에서 오르는 것이 보였다. 마음이 다시 급해졌다. 목장 철조망을 좌우로 번갈아 넘나들며 오르는 길은 심한 오르막길이었는데, 그 길을 한 시간 이상 참고 꾸준히 오르다 보니 삼도봉 정상이 바로 발 밑에 있었다. 전 같으면 그리 무리가 있는 코스는 아니었는데 그 날 따라 다리 근육 통증 때문에 고생을 많이 했다. 잡기 좋은 돌멩이를 주워 쥐 오른 장딴지를 때리면 조금 풀린 듯 한데, 다시 또 근육이 뭉쳐 쉬어 가기를 여러 번 한 후에야 겨우 삼도봉 정상에 오를 수 있었다.

그 곳에서 대덕산을 바라보니 가는 길 중간에 완만하고 긴 억새 밭이 있었다. 갈 길이 매우 힘들 것 같아 혼자 속으로 투덜대 보았지만 이미 발길을 돌리기엔 너무 많이 와 있었고 또 가깝다고 해도 돌아설 생각은 없었다. 대덕산을 지나야 오늘 산행 목적지인 덕산령에 닿게 되기 때문이었다.

삼도봉 내리막길을 터벅터벅 힘없이 내려섰다. 오를 때보다는 장딴지에 힘이 덜 들어가서인지 다리에 쥐가 나지 않았다. 다행이었다. 걱정했던 억새 밭 속을 천천히 걸어가니 나름대로 운치가 있어 좋았다. 산 정상에 올라 정복에서 오는 쾌감의 포효를 부르짖는 것만이 최고가 아니었다. 두어 번 다리에 쥐가 났지만 그런대로 참을만 했다. 그러나 소사재에서 삼도봉으로 오르는 두 시간 길은 대간 산행 중에서 가장 어려웠던 코스였다. 정상에 도착하면 정상주라며 건네주던 마음 따뜻한 그 사람마저도 사라진지 오래였고, 13회 선배들만이 정상 한 쪽에 모여 식사를 하고 있었다. 확실히 세가 강한 선배들이었다. 잔설이 쌓여 있는 대덕산 하산 길 역시 급경사 길이었다. 선명히 나 있는 등산로를 따라 1시간 50분 정도 걸어서 다다른 곳이 덕산령이었다. 신풍령을 떠난 지 8시간 30분만에 선두보다 1시간 이상 늦게 도착한 것이다. 걱정하는 동기들이 따라 주는 한 잔의 술도 몸이 거북해 마시지 못할 정도로 몸은 지쳐 있었다. 그 날 이후, 산을 오르는 데 있어 등산 실력이 가장 발전한 인사 중 한 명이 되어 나는 갑자기 유명 인사가 되어 있었다. 그만큼 힘들었기에 신풍령 고갯길은 다시 찾을 날이 있을 것 같다.

전에도 산을 넘었는데

오늘도 그 산을 만났네.

가지 않으면 산보다 커지는 그리움.

소리 나누며 걷는 것이

그리도 좋은지,

물소리는 없지만,

바람과 나무 잎새 소리는

대간 그만의 것.

앞을 향해 걷다보면

내 사랑 대간이 거기에 있다.

 

※ 대간을 마칠 즈음......

우린 바쁜 날들을 접어 두고

삼년 간을 하루같이 달렸다.

사철 나름대로 삶을 느낄 때,

어둠을 떠나 대간을 향해

힘차게 달려 심장이 터지면

땀방울 흙으로 스며 우릴 키우고

숲은 떠나는 우리 모습에 세월을 잡지만,

숲은 그래도 외롭지 않을 거야.

오는 이들이 있으니......

 

 

백두대간 13구간: 화주봉-우두령

1998년 4월 5일 (일) 6:40 출발

곽경호(26회)

오늘 출발하는 백두대간팀은 총 인원이 50여 명으로 추측된다. 14회 이상만 타는 차에 당번 병으로 김관석이와 동승하였다. 나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적적하여 가지고 간 동방견문록을 보다가 여러 선배들에게서 사랑의 꾸중을 듣다. 몇 페이지 보지도 못하고 말이다. 지난 13구간 산행 후 Bus 타고 오면서 독서의 충동을 강하게 느껴 이번 14구간 산행에 책을 갖고 왔는데 또 튀어 보였겠지. 그러거나 말거나.

나로선 8회 째 백두대간 출정이다. 지난 13구간(나7회)에선 일기도 못쓰다. 왜 그랬을까? 김웅배선배가 바람잡고 취하더니 날 잠 못 자게 깨워 술 먹이고 자기는 잤다. 나 또한 취해서 깩깩거리며 노래부른 일들이 후회스럽다. 하지만 그의 선배 존경과 후배 사랑은 남 다르다. 그 큰 키가 일어서면 버스가 낮아 보이고 휘청한 모습에 작은 소주 잔이 어울리질 않는다. 그 호걸은 맑고 순하다. 치기어린 것을 패기가 카바한다. 가정에선 형수까지 딸 셋을 거느린단다. 현실과 이상을 조화하며 사는 사람일 것이다. 왕왕거리는 목소리와 후후 웃는 너털 웃음. 산에서의 겸손한 자세 그리고 모자 속에 감춰진 빈 머리카락. 영국에서 사 왔다는 체크 무늬 캡. 늘 인화의 중심에 있는 일꾼. 밉지 않은 그의 행적은 백두대간팀의 또 하나의 인물로서 자리잡게 하고 그를 만나서 행복하게 만드는 이상한 힘이 있다고 본다.

빠르게 2주가 지나고 요번도 못쓰면 이 역사가 망각 속으로 빨리는 것이 이상하리 만치 아쉽게 느껴지는 이유가 뭘까?

아침을 옥산(하)휴게소에서 먹는데 4000원 짜리 국밥으로 매우 맛이 없다. 엊저녁 피곤해서 우리 식구들이 9시까지 자고 저녁식사를 대충해서 배가 고픈데 맛없지만 오늘 산행을 위해 밥 한 공기는 모두 비우다. 식후 승차하여 또 자다.

오전 10시 50분경 물한계곡에서 출발하여 산을 오르는데 산길 오른편 민주지산은 3일전 공수부대 하사관 7명이 탈진으로 사망한 곳이다. 그 날 갑작스레 기온이 떨어지고 비가 와서 그랬다고 본다. 오늘의 날씨도 매우 좋지 않다. 추적추적 차가운 봄비가 내리는데 체온을 매우 뺏어간다. 오르면 오를수록 비는 구름 속의 비가 되어 온도가 더 내려간다. 물한계곡에서 1시간15분 올라가서 헬기 장에 도착했는데 온몸이 빗물이라 옷을 갈아입고도 추워서 대원들은 힘든데도 쉬지 않고 바로 행군하여 간다.

시계는 제로로 보이는 게 거의 없다. 희부연 안개구름 속의 행군은 해보지 않은 사람은 그 불안하고 위험하기에 짜릿한 그 맛을 모른다. 드릴과 서스펜스. 지금 구름 속을 통과한다. 아래는 Goretex 바지 하나라 더욱 춥다. 학교에서 苦盡甘來란 단어를 배울 때 느낌이 와 닿지 않더니만 지금은 속으로 고개를 끄덕여진다. 바로 그런 고통의 상태이다. 세월이 오래 지나도 지금을 대원들은 오래 기억할 것이다. 공수부대원들도 저체온증으로 사망할 정도이니까. 위험한 상태라 말들이 없이 심각하다. 앞으로의 삶도 그러하리. 내가 어느 부분에서 괴로운 것을 오랫동안 다 하면 달콤한 순간이 오리라 믿어진다. 그런 생각이 들 정도다. 그런데 그럴 때 이상하게도 집에 두고 온 딸 생각이 간절하다. 아빠가 나가는 걸 보지 못하고 잠들어 있는 나의 보물. 사람이 고통스럽고 험하여 절대적 상황이 되면 절실한 것이 생각나나 보다. 빨리 귀경해서 오손도손 마주하고 싶다.

희부연 구름 안개비 속을 거친 호흡과 더불어 행군한다. 점점 피로감이 들기 시작한다. 방수 코팅이 불완전했던가 신발 속에 물이 찔쩍거린다. Patch를 했어야 했는데... 4시간 지나서 화주봉에 도착했는데 경사를 올라갔는지 모를 정도로 주변이 밋밋해서 잠깐 스쳐 지나다. 추워서 빨리 버스로 돌아가 옷 갈아입고 싶어 발길을 재촉한다. 화주봉을 오르기 전 어디선가에서 도시락을 열고 식사를 하다가 김성화가 보온병에 싸온 연한 된장국을 권해 먹는데 기가 막히다.

화주봉 정상에선 김승남선배와 형수가 먼저 와서 양주 한 잔씩 정상주를 권한다. 늘 그렇듯이... 매번 모든 대원들은 그 분이 권하는 정상 양주를 신세진다. 과일도 철마다 꼭 깍아서 잘라서 여러 사람 먹을 수 있도록 여러 그릇에 나누어 주는데 그 정성이 엄청나다. 그 것 뿐인가. 오며가며 버스에서 술과 함께 푸짐한 안주거리까지 준비하는데 그 시간만도 꽤 걸릴 것이다. 그 공덕은 우리 팀의 보이지 않는 정신적 유대의 대단한 밑거름이자 교훈이다. 사랑과 정성으로 베푸는 헌신과 봉사 그 자체이다. 현철수선배가 매실주를 집에서 담근 것이라며 또 주어 거푸 마시고 목을 약간 덥힌다. 우두령으로의 하산 길은 생각보다 빨랐다. 1시간 남짓이었을 것이다. 생각지도 않게 철탑 지나자 버스가 반갑게 보이다.

버스는 11시 30분 넘어 서울에 도착했으니 많이 막힌 셈이다. 드물게 14회 이상 16명과 26회 우리 둘이 그리고 형수님 한 분 모두 19명이 탄 버스에서 술판이 벌어져 장헌수선배의 양주를 모두 비우고도 모자라 맥주 6 can 소주 4병을 가게에서 샀는데 그게 충분히 모자랐다. 이익효선배가 설설 술이 오르고 그 동기 3성 퇴역장군이 불려오고 2성 퇴역장군 또 그 밑에 육사 후배 정 영 선배가 불려가 술잔이 오고가고, 우리가 더 이상 필요 없을 정도로 되어 가다.

김세윤도 뒤에서 듣기만 하다 술을 많이 마셨는데 그러는 중 내가 이상하게 끌려 들어가서 실수를 하다. 전 치과의사협회장인 Y선생을 약간 비난한 것이다. 그걸 새로 오신 어느 모르는 선배가 지적하다. 그 이후로 나는 자다. 선배들은 술을 매우 많이 드신다. 내가 겪은 바로는 주량이 후배들보다 1.5배는 족히 되는 것 같다. 신명나고 걸찬 걸죽한 대화가 넘치고 다감한 분위기가 시간을 아랑곳하지 않는다.

집에 오니 처자가 기다리고 12시 반 넘어 1시 되어 자다.

 

 

백두대간 제17구간: 추풍령-작점고개-큰재

1998년 8월 22일-23일

이정용(20회)

1998년 8월 22일 토요일 오후 10시에 서울을 출발하여, 23일 일요일 백두대간 종주 구간 중 제17구간인 추풍령-작점고개-큰재를 산행하였다. 이 구간을 산행하면서 나는 인생관이 바뀌는 커다란 전환점을 맞이하였으며, 이것이 수상문을 쓰게된 이유이다.

추풍령 하면 구름도 쉬어 가고, 바람도 자고 가는 고개라 하여 대단히 높고 험준할 것으로 생각되나, 사실은 해발 200m의 밋밋한 분수령에 불과하다. 그러나 서울과 부산의 중간지점이고, 국토의 대동맥인 경부선 철로와 고속도로가 국토의 중추인 백두대간을 넘어가는 고개로 우리나라에서 가장 중요한 고갯길이다.

김하돈씨가 쓴 {(마음도 쉬어 가는) 고개를 찾아서} 라는 기행문을 참고하여 보면, 추풍령은 조선시대에 역과 원으로 이어진 관로였으며, 일제시대에는 경부선을 오가는 증기기관차가 물을 보충하기 위하여 빠짐없이 쉬어 가는 곳이었고, 목탄차 역시 흙먼지 고갯길을 힘겹게 올라와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어 쉬었다 가는 곳이었다고 한다. 또한 우마차의 농경시대에서 자동차의 산업사회로 바뀌면서 추풍령에는 경부고속도로가 생겨 부산을 비롯한 영남에서 서울로 통하는 관문으로 매우 중요해졌으며, 그 분수령은 백두대간 위에 놓여 있다. 조선시대에는 영남대로가 넘어가던 백두대간의 문경새재가 우리나라 고개의 맏형이었다면, 오늘날에는 경부선 철길과 고속도로가 넘어가는 백두대간의 추풍령이 전국 고갯길의 으뜸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따라서 추풍령에는 모든 것이 모여들고, 다시 흩어진다. 구름이 모여들어 쉬고, 바람이 모여들어 잠자며, 사람이 모여들어 잠시 멈추어 선다. 그리고 다시 길을 떠난다. 지금까지 걸어온 모습과는 전혀 다른 모습으로 길을 떠난다. 구름도 변하고, 바람도 변하고, 사람도 변하여 새로운 길을 간다.

나도 추풍령구간을 산행으로 걸어서 넘어 가면서 내 일생에 있어서 가장 큰 전환기를 맞이했다. 즉 아무런 장애 없이 태어나면서부터 지금까지 살아 온 바와 같이, 1998년 5월 16일과 17일에 추풍령의 앞 구간인 궤방령-눌의산-추풍령 구간을 산행하였고, 또한 눈 때문에 위험하다고 하여 남겨 두었던 덕유산 종주 산행도 1998년 6월 5일과 6일 그리고 7일에 걸쳐 원만히 끝냈다. 그리고 아무 근심 걱정 없이 추풍령에 멈추어 서서, 여름방학 동안 충분히 휴식하였다. 특히 2학기부터는 1년간 안식년을 허락 받았기에 강의에서 해방되어 연구, 집필, 독서, 등산, 여행 등 모든 것을 자유롭고 여유있게 진행하고자 계획하고 있었다.

그런데 추풍령을 넘어 백두대간 산행을 시작하고 자 하는 날, 즉 1998년 8월 22일 토요일, 뜻하지 않은 재앙이 다가 왔다. 소위 말하는 삼재가 시작되었고, 첫해에 들어오는 삼재가 혹독하게 다가 왔다. 배신, 배반, 반역, 분노 그리고 무기력. 이러 하지도 저러 하지도 못하는 나의 모습이 너무나 초라하고 애처로웠다. 백두대간 산행을 위하여 여의도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선길 (20회)동기 동창과 오후 9시에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기로 약속되어 있었는데, 이행할 수가 없었다. 할 수 없이 오후 7시에 미안하게 되었다는 전화를 하니 안타까워 한다. 정말 안타까운 일이다. 전화를 끊고 넋빠진 사람처럼 소파에 앉아서 허공을 초점 없이 바라보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그러다 힘없이 일어나 주섬주섬 배낭을 챙겼다. 이렇게 앉아 있다고 일이 해결될 것도 아니고, 속만 상하니 산에나 가자. 그래 죽이던지, 죽던지, 살리던지, 살던지, 될 대로 되어라. 백두대간에 가자. 다시 이선길 동기동창에게 전화하고 버스 정류장에서 만나 추풍령 산행 길에 나서게 되었다.

처음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시작 할 때, 솔직히 나는 백두대간이 무엇인지 몰랐다. 그저 이선길 동기동창이 1997년 9월 5일에 지리산 등산을 가자기에 한번도 안가 본 곳이기에 따라 나섰다. 산행하는 일행이 모두 서울고 동문들이지만 동기동창 외에는 아무도 알 수가 없어 매우 낮설었다. 또한 큰산을 산행한 경험이 없기 때문에 산행요령이 없어 중산리를 출발하여 법계사를 지나 천왕봉에 오를 때, 앞사람을 어떻게 해서든지 붸아가고 뒷사람에게 뒤지지 않기 위하여 정신없이 힘으로 올라갔으며, 그후 벽소령 산장까지 가는 구간도 뒤쳐지지 않는 데 온 정신을 쏟았다. 그리고 장비도 형편 없었다. 속옷으로 메리야스를 입고 있어 땀으로 철벅 젖어 있었으며, 랜턴도 없어 밤중에 벽소령 화장실에서 말 못할 곤란을 겪기도 하였다.

9월 7일이었다. 연하천 산장에서 아침식사를 하고 또다시 산행이 시작되었다. 토끼봉을 올라가는 데, 앞에 김종교(16회)선배님이 뚱뚱한 몸으로 가쁜 숨을 쉬며 천천히 오르고 있었다. 나는 앞질러 보고 싶은 자만심이 은근히 솟아올랐다. 그래서 보란 듯이 힘을 내서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나갔다. 무척이나 많이 앞질러 갔다. 그런데 정상에 올라 조금 쉬고 있는 동안에 김종교선배님이 언제 따라 왔는지 바로 따라 와서는 쉬지도 않고 그냥 지나가는 것이었다. 나는 다시 일어나 더욱 힘을 내어 더 빠른 걸음으로 앞질러 삼도봉을 올라갔다. 그런데 너무 과속을 하는 바람에 그만 현기증을 일으키고 정상에서 한참동안 누워 있어야만 했다.

그러는 동안 많은 사람들이 앞서 나갔다. 이를 악물고 일어나 따라 나섰고, 노루목 고개마루에서 쉬면서 반야봉을 올라갈 것인가, 그냥 우회할 것인가, 고민하다가, 이왕 지리산에 온 김에 올라가 보기로 마음먹고, 선배들을 따라 발걸음을 옮겼다. 무척이나 지쳐있는 나를 보고 이상현(11회)선배님이 천천히 올라오라고 이른다. 이때 선배님이 쓴 킬리만자로 기행문을 읽은 것이 생각났다. "초원과 사막으로 된 등산길을 걸으면서 터득한 뽈레 뽈레(아프리카 말로 '천천히 천천히')는 수도자의 인고의 걸음을 보다 더 조심스럽게, 보다 더 겸허하게 만들었다"는 구절이 떠올랐다. 바로 이것이다. 수도승이 염불소리에 맞춰 탑돌이하듯이, 순례자가 끝없이 이어진 성지를 순례하듯이, 천천히 그러나 꾸준히 걷는 것이다. 순례자의 걸음을 나의 산행걸음에 접목시켜 보았다. 반야봉을 무난히 오를 수 있었다.

반야봉 정상에 오르니 장헌수(14회)선배님이 한 사람, 한 사람 기념 촬영을 해 주고 있었다. 나도 반야봉 표지석을 끌어 안고, 천왕봉을 뒷 배경으로 하여 사진을 찍었다. 멀리 천왕봉으로부터 걸어온 백두대간 능선길이 뚜렷이 보이고, 그늘 속에 반야봉이라는 한문 글씨가 희미하게 보이는 사진이다. 이 사진을 내가 매우 마음에 들어 좋아하니, 장헌수선배님이 확대하여 액자에 넣어 선물해 주어 지금도 학교 연구실에 걸어 놓고 항상 바라볼 수 있는 기쁨을 누리고 있다. 연구실에서 이 사진을 볼 때마다 느낌이 다르게 다가온다. 봉우리 이름을 반야심경에서 따온 것 같은데, 그러면 모든 것이 (빌)空이라는 것을 암시해 주는 것 아닌가. 그 동안 걸어온 인생살이의 모든 희노애락이 모두 공이라는 것 아닌가. 그렇다. 무엇인지 잘 모르지만 그 동안의 모든 것이 아무 것도 아닌 것만 같다.

나는 반야봉 등산 이후 지명에 대하여 관심을 갖게 되었다. 이전에는 그저 산봉우리이고, 계곡이고, 고개라 생각하고 이름은 알아서 무엇하랴 하고 지명에 대하여 의도적으로 무관심해 왔었다. 오히려 무슨 봉우리, 무슨 계곡하며, 지명을 외우고 있는 사람들을 보면 한심하다고 경멸까지 했었다. 그저 봉우리로 보고, 계곡으로 보면 되는 것이지, 명칭이 무슨 필요가 있느냐는 사고를 갖고 있었다. 그런데 반야봉에서 내 생각이 짧았음을 알았다. 지명과 지형을 잘 연관지어 보니 의미있는 교훈이 아로새겨져 있음을 알 수 있었다. 나도 지명을 외우기 시작하였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횟수를 점차 늘려 나가자 낯설음이 가시고 익숙해져 얼굴도 알고 이름도 알아지게 되었다. 그리고 산행을 마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안에서 술도 주고 받으며 마시고, 이런 저런 이야기도 나눌 수 있게 되었다. 지금 기억이 뚜렷하지 않은데, 아마 1997년 11월 하순경 단풍도 다 떨어져 가는 봉화산 구간을 산행하고 서울로 올라오는 버스 안에서의 일일 것이다. 당시 총산우회 회장님이신 이익효(11회)선배님께서 젊은 후배들과 술을 들면서 이런 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는데, 어느 한 후배가 건의사항이 있다고 하면서 백두대간 산행을 지금처럼 단순하게 산행만 하지 말고, 어떤 주제를 내걸고 다같이 의미있게 행사를 치루자고 주장하였다. 나도 귀가 쫑긋 해지고 좋은 제안이라 생각되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이익효 회장님의 응답은 의외였다. 즉 우리 서울고 동문산우회의 백두대간 산행은 여러 동문들을 태우고 긴 여행을 하는 기차와 같고, 기차를 타고 있는 여러 동문들은 각자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무엇이던지 하면 된다는 것이다. 참으로 멋있고 의미있는 말씀이었다. 시인 천상병씨는 인생이란 각자 하늘에서 내려와 나름대로 소풍놀이 하다가 다시 하늘로 돌아가는 것이라 하였다.

그때 나는 백두대간 산행에 대하여 깊이 생각해 보았고, 그리고 내 나름대로 커다란 주제를 내 걸었다. 즉 먼저 조국의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가슴에 안고, 백두산을 향하여 힘차게 나아가자, 다음 국토와 자연을 사랑하자, 그리고 동창들과 우정을 다지자, 끝으로 나의 건강을 지키자, 이를 위해 백두대간을 꼭 완주하자는 등. 이와 같은 주제들은 그후 잘 지켜졌다. 백두대간 산행을 위하여 준비할 때마다 이 주제들을 마음속에 새겨보고, 산행 중에도 가끔 이 주제들에 대하여 생각 해 보곤 했다. 특히 가파른 산을 오르다 힘이 들 때는 평화통일에 대한 염원을 크게 내 세웠고, 정상에서 풍경을 바라 보면서는 국토사랑을 크게 내세웠다. 이들에 대한 관심이 원체 컸기 때문에 어떠한 볼일도 백두대간 산행을 방해할 수가 없었고, 산행도 매우 즐거워 졌다.

그런데 이들 주제가 1998년 8월 23일 추풍령에서 작점고개를 넘어 큰재까지 산행하는 동안에 모두 사라져 날아가 버렸다. 즉 8월 22일 토요일 나에게 다가온 어마어마한 불행한 사건을 일단 덮어놓고 가까스로 산행에 나서 추풍령으로 가는 버스를 탓지만, 나의 머리 속은 온통 사건에 따른 흑막으로 꽉 차있어 한 잠도 잘 수가 없었다. 그리고 8월 23일 산행 중에도 머리 속은 온통 사건으로 꽉 차있어 그 동안 잘 지켜온 산행주제가 생각나질 않으며, 배반에 따른 분노가 치밀어 오르고, 온몸의 피가 역류하여, 숨이 차서 더 이상 걸어 갈 수가 없었다. 혼자 길가에 앉아서 머리를 다리사이에 틀어박고, 한참동안 분을 삭여 진정시키고 나서야 겨우 일어나 힘겨운 발걸음을 옮길 수 있었다.

내 나이 50이 너머 지천명인데, 이게 천명이고, 내 팔자란 말인가. 천명에 거역하는 반항심이 부글부글 들끓어 올라 왔다. 발광하고 미칠 것만 같았다. 머리에 열이 오르고, 가슴이 답답했고, 다리에 힘이 쭉 빠졌다. 모두들 이렇게 밋밋한 산에서 웬 일로 헐떡거리냐고 한마디씩 하지만 아무런 대꾸도 할 수가 없었다. 산행하는 한 걸음, 한 걸음이 정말 힘 들었다. 이토록 힘든 산행을 하던 중에 불현듯 마음을 고쳐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혼자 속으로 중얼 중얼거렸다. 분노를 삭이자. 천명에 순응하자. 내 팔자로 여기자. 모두에게 자비를 베풀자. 모든 것을 잊어버리자. 새 출발을 하자. 아무 것도 생각하지 말자. 무념무상에 빠지자. 나의 호가 무소, 즉 없을무 바소, 즉 아무 것도 없다는 것 아니냐. 무엇을 욕심내냐. 모두 다 주어 버리자. 나의 인생만 남기자. 등등. 그저 중얼거렸다. 반복하고 또 반복하여 중얼거리며 터덜터덜 발걸음을 옮겼다. 큰재에 도착하여 산행을 마쳤을 때, 나는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있었다. 내 스스로 내가 아니라고 느껴졌다.

이와 같이 1998년부터 들어오는 삼재의 해가 시작되었고, 이를 극복하는 과정에서 백두대간 종주 산행의 주제는 완전히 바뀌어 버렸다. 즉 이제는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생각을 하지 않기 위하여 산에 올라 가는 것이 되었다. 그저 어떤 생각도 없어지도록 산에 올라가는 것이었다. 마냥 올라갔다. 땀을 뻘뻘 흘리고, 숨을 가쁘게 쉬면서 산을 오르고 또 올라갔다. 무척이나 많이 다녔다. 그러다 보니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아무 것도 생각이 나지 않게 되었다. 그저 무념무상에 빠지기 위하여 산에 가는 것이다. 술도 무척 마셨다. 취해서 나만의 세상에서 살고자 했고, 지금도 기억할 수 없는 환상적인 우주여행을 한 적이 많았다. 하기야 인생도 무엇이 되겠다고 목표를 정하고 열심히 노력하다가, 우리 나이가 되면 모든 것을 팔자소관으로 돌리고 아무 생각 없이 그저 살아가고 있는 것 아닌가.

1999년에는 묵는 삼재의 해가 되어 한해동안 숨죽이고 납작 업드려 보내느라 정말로 혼났다. 너무 숨죽이고 살다보니 체력이 무척이나 약화되었다. 그런데 백두대간 산행 구간은 문경새재에 접어들어 소백산을 종주하면서 무척이나 길어지고 오르내림이 심해졌다. 따라서 이번에는 힘이 달려 산에 오르는데 문제였다. 그래서 산에서 기를 받아서 산기운으로 올라가는 비법을 사용했다. 즉 배로 숨을 쉬면서, 보폭을 좁게 하고, 리듬 있게 뽕짝노래를 속으로 부르며 산행하는 것이다. 그리고 냉기가 느껴지는 곳에서는 잠시 멈추어 서서, 모든 땀구멍을 열어놓고, 입을 벌려 깊은 숨을 천천히 들이쉬고 내쉬는 것이다. 특히 정력을 키우기 위하여 되도록 자주 소변을 보는 척하면서 거시기를 꺼내서 바람을 쏘이고, 금붕어가 물을 먹듯이 산의 정기를 먹인다. 이 비법으로 무척이나 긴 구간도 느리지만 꾸준히 걸어 갈 수 있었다.

새천년 2000년에는 나가는 삼재의 해가 되면서 내 생활은 한시름 벗어나고, 안정을 되찾아가기 시작하였다. 백두대간 종주 산행도 무척이나 많이 진행되어 대관령을 넘어서는 구간까지 왔으며, 전구간 완주가 손안에 잡혀왔다. 3월 26일 일요일에는 당일치기로 삽당령에서 닭목재까지 가볍게 산행하면서 개근상을 생각해 보니, 가슴이 뿌듯하고, 지난 2년 반 동안의 산행기록이 아련히 떠올랐다. 학교 연구실과 집 공부방의 벽에 전국지도를 붙여 놓고, 산행한 곳을 빨간 펜으로 표시해 놓았는데, 쭉 뻗어 올라온 모습이 매우 아름답다. 참으로 많이 걸어 왔다.

그런데 4월 9일 일요일 새벽 대관령에서 산불감시원들에게 입산을 저지 당하면서 더 이상 백두대간 산행을 진행시킬 수가 없게 되었으며, 또한 언제 해제될지 기약 할 수도 없었다. 그후 산행예정이 통보되었다가 취소되는 사례가 몇 차례 있었고, 그때마다 생활리듬이 엉망이 되었다. 걱정이 되었다. 계획해 놓았던 앞으로의 모든 일정이 불확실하게 되었고, 어떠한 학교 일로 백두대간 산행이 방해받을 것 같은 두려움이 느껴졌다. 문제는 그 동안 한번도 안 빠지고 개근해 왔으며, 또한 앞으로 얼마 남지 않은 구간을 꼭 개근해 보겠다고 마음먹은 것이었다. 앞으로 결석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나를 대단히 구속하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자유를 완전히 박탈당하고 있었다. 모든 사람들이 자유롭기를 갈망하듯이, 나도 자유롭기를 무척이나 갈구 해 왔다. 그리고 실제로 매우 자유롭게 살아 왔으며, 너무 자유롭게 행동했는지 '삐딱하다'는 소리도 많이 들어보았다. 경제학의 아버지라 하는 아담 스미스는 1759년 그의 저서 {도덕 감정론}에서 인간의 여섯 가지 동기 가운데 하나를 자유라고 보았다. 자유는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그런데 지금 나는 어찌하다 백두대간 완전 종주라는 개근상에 이렇게 구속되어 있단 말인가. 한심한 생각이 들었다.

산불 때문에 입산금지 된 후, 2개월이 지나 비오는 계절이 되어서야 백두대간 산행이 다시 시작되었다. 반갑다는 생각보다는 나의 자유가 너무 구속되어 생활에 지장을 초래하고 있다는 생각이 앞섰다. 따라서 백두대간 완주 개근상을 파괴시켜 해방되고, 자유롭게 생활해 가는 것이 더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5월 27일 토요일 산행준비를 하는데 종전과는 달리 시무룩한 표정으로 주섬주섬 무성의하게 배낭을 챙기자 아내가 이상하게 생각하고 자꾸 말을 붙여왔다. 그저 투명스럽게 대답하고 집을 나섰고, 대관령-진고개 구간을 산행하였는데, 그렇게 재미가 없을 수 없었다. 설상가상으로 노인봉 산장 밑에서 길을 잘못 들어 엉뚱하게 병내리로 하산하였고, 버스 안에서 L 동기동창과 언쟁을 하기도 하였다. 자유에 대한 갈망이 잠재의식 속에 너무나 크게 자리잡고 있었다.

이어서 6월 11일 토요일에 산행이 있다는 연락을 받았지만, 나는 산행준비를 하고 있지 않았다. 그러자 눈치 빠른 아내가 같이 가자고 조르는 것이다. 산행길이 험하고 길어서 불가능하다고 하자, 버스 안에서 쉬어도 좋으니 걱정 말고, 맑은 공기나 흠뻑 마시러 가자고 하면서 서두르는 것이다. 할 수 없이 배낭을 챙겨서 아내와 같이 백두대간 산행길에 오르게 되었다. 그후 아내가 몇 차례 동행해 주었는데, 아내와 같이 가면 여러 사람 앞에서 언행을 각별히 조심해야 하는 커다란 구속을 받았지만, 오히려 버스에서 옆에 아내가 앉아 있으니 편안했고, 잠도 잘 왔고, 교통체증도 짜증나지 않았다. 산행할 때도 목적지에서 아내가 기다리고 있다고 생각하니 힘이 솟고, 발걸음이 가벼워졌다. 그리고 백두대간 완전 종주라는 구속도 부드럽게 다가왔다. 사람은 완전히 자유스럽게 사는 것보다는 어느 정도 구속을 받으며 살아가는 것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침내 2000년 10월 1일 3년에 걸쳐 백두대간 종주 산행을 한치의 오차도 없이 모두 끝냈다. 내가 생각해도 놀라운 기록이다. 산행이 끝났어도 백두대간 모든 구간 구간이 수없이 생각난다. 시도 때도 없이 풍경이 나타났다 사라졌다 한다. 그 중에서 추풍령이 가장 궁금하다. 오늘도 추풍령에는 모든 것이 모여들고, 잠시 멈추어 섰다가, 다시 흩어져 떠나가고 있을 것이다. 이제 앞으로의 산행은 산에 포근히 안기어 산의 향기를 맞고, 산의 공기를 들이쉬고, 산의 물을 마시는 등, 산과 어울려 지내고자 산에 들어가고 자 한다.

 

 

백두대간 제27구간: 하늘재-포암산-대미산-작은차갓재

1999년 4월 11일(일)

이규도(22회)

신라의 마지막 황태자 마의태자에 대한 전설이 서려 있는 곳은 많다. 하늘재로 가는 길목에 위치한 사적 317호 미륵사지(보물 95호 5층석탑외 다수)도 그 중에 하나이며, 유난히 나의 눈길을 끄는 거대한 검은 돌거북이 있다. 천년 왕국의 몰락을 지켜보며 어찌 비애와 한탄이 없었겠는가? 화려한 옛 왕국의 부활을 꿈꾸며 이 거대한 돌거북을 앉혀 놓았으리라! 그러나 천년의 세월이 흐른 뒤에도 미륵은 나타나지 않았고, 신라는 다시 부활하지 않았다. 아마 앞으로 천년이 지난 후에도 미륵은 나타나지 않을 지도 모르고, 신라는 부활하지도 않을 것이지만, 돌거북은 그래도 세월을 기다릴 것이다. 무수한 사람들이 그곳을 지나칠 때마다 그 돌거북을 바라보며, 각자 나름대로의 의미와 해석을 새겨 보는 것만으로도 천년을 넘게 한자리에 웅크리고 있는 돌거북의 역할은 충분하였으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닐 것이다.

새벽 6시경 옛날 마의태자도 오르내렸을 하늘재로 가는 숲속 길은 간밤에 내린 비로 주변의 나뭇잎은 제법 파릇파릇하고 개울가 물소리도 정겹고 공기는 신선하고 청아하였다. 산행하기에는 그저 그만인 날씨였다. 하늘재에서 포암산(961.8m)으로 이어지는 가파른 오르막이 만만치 않았다. 산성터의 폐허의 잔해를 거치고 오르는 길목 '하늘샘'에서 한모금 목추기며 50분가량 오르니 포함산 정상이다. 북쪽으로 월악산 암봉의 위용이 시야에 들어오고, 남쪽으로 주흘산의 혹부리같은 봉우리들이 시원스럽게 펼쳐진다.

북동쪽으로 난 대간길은 938.3봉까지 능선이 아름다웠다. 좌우의 경관도 좋고 봄바람 살랑이는 것이 날아 갈 듯 상쾌하여 한없이 내닫고 싶은 기분이었고 대미산까지 단숨에 갈 것 같았다. 844봉 부근에선 남서쪽 주흘산 봉우리, 수목사이로 보이는 월악산 전경이 너무 좋아 사진도 찍고 한참이나 머물며 요란을 떨었다. 그러나, 1032봉-1034봉-부리기재-대미산까지의 길고 긴 오르내리막 능선길이 너무 좋았던 게 방심일까? 아니면 지난주 내내 문상에 지방을 다니느라 누적된 피로의 탓일까? 부리기재에서 대미산(1115m) 오르는 도중, 다리에 이상 조짐을 느꼈다. 간신히 대미산 정상에 오르니 다리에 쥐가 나고 다리 근육이 돌덩이처럼 굳어 갔다. 정상에서 멋진 사진 찍는 것은 접어 두고, 침으로 손가락따니 검붉은 피가 홍건히 나왔다. 점심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 도움을 청하니 야속한(?) 22회 동료들은 괜시리 엄살을 부린다며 힐란 하며 점심을 먹자마자 베낭을 챙기고 바람처럼 가 버린다.

후미로 처지니 못난 것 같고(이제까지 대간 길에 후미에 많이 처졌으니 새삼스러울 게 없는 데도)다리를 절뚝거리니, 여상구. 이선길 선배는 안타까운 듯 몇번이나 다리를 주물러 주고 근육을 풀어 주었으나 별무 효과였다. 대미산에서 바라본 차갓재로 이어진 그림같은 능선이 아마득하게만 보였다. 허기도 지고 몇 번이나 펄썩 주저앉고 싶은 마음에, 왜 백두대간을 시작했는지 후회도 되고 회의도 일어났다. 그렇지만 내려가야 할 길이고, 이만한 각오 한두번 이었던가. 문득 70년대 어려웠던 시절, 80년 후반기 고생하며 전전했던 아련한 기억들이 새삼 봄바람에 막 스쳐 지나간다.

간신히 차갓재에 이르렀으나 작은차갓재의 완만한 오르막이 오늘은 왜 그리 힘드는지 ...... 베창골로 내려 설 때는 끝까지 옆에서 동행하며 지켜 봐주던 후배 상영이도 더 이상 답답하고 못 참겠다는 듯 먼저 내려 가 버렸다. 나무를 잡아보기도 하고, 거꾸로 내려가 보기도 하면서 지팡이에 의지하여 가까스로 베창골 안산다리(고느적한 산골마을이었다.)에 도착하니 모두들 씻고 쉬고 있었다. 나만 내려오면 막 출발하려는 것처럼 느껴졌다. 맨 꼴찌로 내려 온 주제에 머리에 물을 추길 수 있는 것만도 얼마나 감지덕지인가! 선배들의 배려가 고마웠다. 이런 상태로 과연 백두대간 나머지 구간을 종주할 수는 있을까? 매번 이 모양이니.... 차안에서 막걸리 한 사발에 그대로 골아 떨어졌다.

그리고, 2주후 새벽 4시경 베창골 안산다리에서 황장산 위에 걸쳐 있는 참으로 아름다운 별빛과 은하수를 보았다. 나는 백두대간을 계속 이어 걸었다.

 

백두대간 30구간: 죽령-소백산-고치령

(남편은 산의 전도사: 초보등산인의 입문기)

1999년 5월 21일-22일

조성미(20회 김웅배 부인)

난 지금 신앙 고백과도 같은 등산 입문기를 쓰고 있다. 내가 백두대간의 작은 몇자락이라도 접한 그 처음은 99년도 초여름의 소백산구간 이었다.

사실 나의 등산 실력이라야 아주 미천한 것이어서 남편을 따라 청계산, 북한산 등을 가는 정도였다. 워낙 산을 좋아하는 남편은 마음으로는 내가 함께 가주길 바라면서도 결코 같이 가기를 강요하는 적이 없었다. 그날도 선뜻 권한 것은 아니었다. 단지 남편은 소백산 코스가 비교적 완만하다는 말만 했었을 뿐이었는데, 산행 다음날에 있을 동강 래프팅에 매력을 느낀 나머지 내 스스로 따라 나선 것이었다. 그 날의 느낌은 참 좋았다. 따뜻하시고 멋지신 선배님, 동료, 후배님들과 기획부터 실천, 협동, 분담 등 등을 지켜보면서 산사나이들의 집단에 크게 고무된 것이다.

난 아직도 산길에 어둡다. 얼마가 남았는지도 몇 시간을 가야 하는지도 모른 채 그저 내가 산과 같이 호흡하고 있고, 이 순수하고 진실할 것 같은 사람들과 같이 뭔가 하고 있다는 뿌듯한 느낌으로 걷는다. 그리고 가끔은 눈을 들어 뒤를 본다. 잠깐 사이인 것 같은데 내가 지나 온 길은 벌써 몇개의 봉우리를 뒤로 하고 있다. 난 그저 말없이 잠시 걸은 것 뿐인데....

우리 인생도 그런 것이 아닐까? 그저 그날 그날을 묵묵히 살았을 뿐인데 내가 살아온 흔적은 여기 저기에 남아 있다. 크게 튀지도 않은 채 자그마한 봉우리며 능선이 조용히 그렇게 있는 것처럼.

난 산을 사랑하는 모든 사람들이 참 좋다. 그냥 참 좋은데 왜 좋은지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어 글로 옮기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짧은 필설로 옮기다 보면 그 보다 덜해질 것 같아 두렵기 때문이다.

난 지금 제주에 산다. 내 뜻과 무관하게 그리 되었고 또 내 뜻과 상관없이 서울로 가겠지만 짧은 제주생활을 할 수 있는 계기를 준 남편에게 고마움을 느낀다. 그리고 우리를 보기 위해 와 주시는 많은 분들이 고맙다.

집에서 10분이면 바다에 닿을 수 있고, 눈을 들어 쳐다보면 그곳에 민족의 영산이라는 한라산이 있다. 매일 보는 바다의 얼굴도 늘 다르고 10회 이상 올라본 한라산의 모습도 다 달랐다. 늘 다른 얼굴의 한라산이 있어 참 좋다. 백록담에 오르기 위해 먼길 마다 않고 와 주셨던 30여분의 20회 동기들, 10여분의 대선배님들께 감사 드린다. 좀더 잘 모시지 못했던 점에 송구함도 느끼고.

그후 생겨난 새로운 꿈이 있다면 어느 산자락에 살면서 산이 좋아 찾아오는 많은 이들의 동무가 되는 것도 좋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러고 보니 이건 늘 말하던 남편의 꿈과 같아져 버린 것이다. 노후엔 설악산에서 살겠다는, 이쯤 되면 남편은 완벽한 산의 전도를 한 것이 아니겠는가.....

백두대간을 가면서 "하늘의 별이 손에 잡힐 듯 하다는 것"이 글 잘 쓰는 이들의 말장난이 아니었음을 실감했었다. 전공이 이과여서인지 문학이라든지, 글쓰기의 재주가 전혀 없는 내게 그건 그저 그렇게 감성적으로 표현한 것이겠거니 했었다. 근데 그게 아니었다. 그 무수하고 커다란 별들은 그저 내가 만질 수 있는 거리에 있었다. 그때의 감동적인 장면은 평생을 두고도 잊혀질 것 같지 않다. 손에 잡힐 듯 펼쳐진 무수한 별들, 샹들리에처럼 영롱한 주먹만한 구슬들이 온갖 나무마다 매어 달려 바람에 달그락거리는 소리..... 바람 부는 대로 생겨난 나무 위의 눈꽃이며 얼음조각들, 끝간데 없이 펼쳐진 운무 속의 하얀 눈밭, 이 모두가 산이 거기에 그렇게 있기에 내게 보여준 많은 장면들이다.

새벽의 어둠속에 버스가 토해낸 많은 사람들이 누구랄 것도 없이 그저 뭔가를 향해 묵묵히 걷기 시작하는 장면도 내겐 대단한 감동이었다. 그리고는 이렇게 산에 빠져 산을 예찬하고 있음이니..... 건강에 대한 관심도 산을 좀더 오래 오를 수 있는 바램이니. 난 감히 전도는 이렇게 하는 것이다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백두대간 30-31구간: 죽령-소백산 비로봉-박달령

1999년 6월 28일(월)

이승옥(8회)

청량리역에서 밤 10시반 발, 강릉 종착역인 단양행 열차표를 사고 손가락 만한 battery 10개를 샀다. 기차를 타고 졸고 앉아 있으니 어느덧 새벽 2시 반이 되어 단양 역에 도착하여 택시로 25분 가서 3시경에 죽령 휴게소에 도착했다. 한여름에 안개구름이 잔뜩 낀 시멘트 포장도로 30여분 오르니 바람이 세차게 불고 풀잎에는 이슬이 잔뜩 맺혔다. 바람 속에는 가는 빗방울도 섞인 듯했다.

새벽녘에 반딧불 떼가 가끔 오가는 것도 신기하였다. 그리고 숲 속에서 박쥐인가 무슨 동물이 인기척을 듣고 후닥닥 놀라 도망가는 소리가 들렸다. 제2 연화봉 중계소에서 개 짖는 소리가 섬뜻 신경을 곤두서게 하였다. 제2 연화봉 천체관측소 제1 연화봉을 지나니 바람이 약간 줄어들고 동이 트기 시작하였으나 비로봉과 국망봉 사이에는 다시 바람이 세어서 여름산행인데도 어느 순간에는 오싹 해지는 느낌도 들었다.

큰 나무 하나 없이 낮은 고산식물뿐인 평원 같은 길을 힘내어 걸어 비로봉 정상 1439m에 올라 긴 숨 몰아쉬고 지나온 능선과 앞으로 갈 연봉들을 바라보며 국망봉을 지나 상월봉에 오르니 아직 구름 속에 잠겨있고 발아래 풍기는 구름사이로 햇살이 쏟아지고 순식간에 구름과 안개가 걷혔다. 산길 바닥에 앉아 아침이랄까 간식을 먹었다.

해발 1300-1400m 능선을 오르내리는 아기자기한 산봉우리는 위치와 모양에 따라 천태만상의 장관을 이루었다. 크고 작은 봉우리와 바위들이 침묵 속에 조용히 무엇을 속삭이는 것 같았다.

상월봉과 늦은맥이재를 지나니 아주 지루한 높고 낮은 능선 산행이 끝도 없이 이어졌다. 눈앞에 펼쳐진 세계는 차라리 하나의 넓은 정원과 같이 아늑하였다. 10시 30분 경에 늦은매기재에서 마당치를 향해 가는데 어떤 젊은이를 만났다. 물 있는 곳은 고치령까지 가려면 2시간 가량 걸리는데 물이 필요하면 주겠다고 친절을 베풀었다.

12시 반경 고치령 샘물 앞에서 점심을 먹는데 비포장도로에 지나가는 차마다 서면서 버스 정류소까지 태워다 주겠다고 하였다. 너무나 고마운 편승 인심이었다. 600cc 물병 2개를 채우고 다시 걷기 시작했다. 이제부터는 몸도 약간 지치고 땀이 너무 많이 나서 옷이 흠뻑 젖었는데 바지의 물이 흘러들어 양말과 신발까지도 젖었다. 900m-1000m 봉우리를 계속 오르내리는데 몸이 너무 지쳐서 간식도 안 먹히고 먹고 싶은 것은 오직 물뿐이었다. 4시간만에 물도 다 떨어지고 이제는 물을 찾을 때까지 어느 만큼 계곡을 내려가야 할 판이었다. 갈증을 억지로 참고 두어 개의 봉우리를 오르내리면서 갈곶산을 넘어 늦은목이에 터벅터벅 내려가니 기진맥진하였다.

우선 물을 찾아야 하는데 먼저 갔던 우리 일행도 이곳에서 물을 찾지 못했다고 하였다. 물 있는데까지 계곡을 내려갈 각오를 하고 물이 있다는 서쪽으로 내려갔다. 벌써 8시가 넘으니 어둡기 시작하는데 헤매며 풀숲을 지나면서 200m쯤 가니까 어데 선가 아주 작은 청개구리가 풀잎에 와 앉았다. 어찌나 반가웠던지 쳐다보면서 근처에 물이 있다는 감을 잡았다. 주위를 샅샅이 살피니 어디선가 졸졸 물 흐르는 소리가 들리고 대나무 숲 사이로 물이 조금씩 흐르고 있었다. 댓잎을 따서 물길을 끌어놓고 한참 있다가 물이 맑아진 듯하여 물을 받아 가지고 길목에 와서 손전등을 켜고 저녁을 먹고 다시 북쪽으로 선달산으로 향했다. 선달산 중턱에 다다르니 다시 물도 떨어지고 지쳐서 몇 번이고 누었다가 가고는 했다. 이제부터는 휴대전화기도 불통이다. 언덕은 가파른데 선달산에 오르니 밤 11시가 넘었다. 왜 이렇게 시간이 많이 걸렸는지 나도 모르겠다. 아마도 지쳐서 쉬는데 시간이 많이 흐른 듯하였다.

선달산에서 북동으로 15분 가다가 동남으로 쭉 1시간 반이나 오르내리면서 12시 반경에 박달령에 다다르고 샛길 언덕 계곡으로 내려와 오전약수 물공장에 도착하니 이튿날 새벽 1시 30분이었다. 여관, 호텔, 여인숙의 간판을 보고 문을 두드려도 들어가 보아도 숙박을 거절하였다. 혹시 라면을 팔거나 맥주나 음료수를 파는 곳이 있으면 사먹고 싶었으나 아무리 찾아보아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약수터를 찾아 물로 목마름과 배고픔을 채우고 할 수 없이 음식점 마당 앞에 놓여있는 평상에 침낭을 펴고 잠을 청하였으나 깊은 잠을 잘수 없었다. 약간 잠이 들다 깨어보니 새벽 4시 반이 되어 훤히 밝기 시작하였다. 잠도 안 오고 하여 일어나 다시 샘터에 물을 먹으러 갔다.

샘터에서 어떤 젊은이를 만났다. 봉화나 영주 가는 버스가 몇 시에 오느냐, 어디서 타느냐고 물으니 8시나 되어야 첫차가 온다고 하였다. 내 몰골이 피로해 보이고 좀 거북해 보였던지 어떻게 이 새벽에 약수를 드시러 오셨느냐고, 어디서 오셨느냐고, 무엇 때문에 왔느냐고 꼬치꼬치 묻기에 대답해주니 아저씨 직업이 무엇이냐면서 주민 등록증을 보자고 하였다. 직업이 없고 깊은 밤에 생각할 수도 없는 50km 이상 되는 먼 산길로 혼자서 온 데다가 주민등록증도 없이 노지에서 밤을 지세웠으니, 게다가 상세한 지도 복사본에 좋은 나침판을 갖고 있으니까 여러 가지로 수상하게 여긴 모양이었다.

"아저씨 제가 영주에 가니까 가는 길에 모셔다 드리겠습니다. 그리고 아침식사도 안 잡수셨을 터이니 아침은 제가 사겠습니다. 그러나 영주에 가시면 저하고 잠깐 어디를 가셔야 하겠습니다. 갈 곳이 어디냐고 물으니 영주경찰서에 가서 신분을 확인하셔야 하겠습니다"한다. "좋습니다. 나는 어젯밤 11시부터 산행 중에 휴대전화기가 불통이고 이곳에 와서도 동전이 없어 공중전화를 못하고 걱정을 하던 중인데 잘 되었습니다. 그리고 우리 집에 전화해 보면 금방 확인할 수 있지요. 여보시오 나처럼 머리가 하얀 사람도 간첩이 있소!" 배낭을 가져오려고 평상으로 가니 내가 가는 곳을 물끄러미 쳐다보면서 감시하고 있는 꼴이었다.

아침을 먹으러 음식점에 들어가 보니 자기 상사처럼 보이는 사람이 앉아 있었다. 닭죽을 같이 먹고 영주로 가는 길에 주실령을 넘어가니 휴대폰이 터져 우리 집에 전화를 걸어 안심시키고 젊은 친구에게 우리 집과 통화하게 하여주었다. 그때서야 신분이 확인되니 의심을 하여 죄송하다고 여러 번 사과를 하였다.

그리고 고개 밑에 있는 두내라는 마을에서 탄산과 철분이 함유된 약수를 마시고 영주고속버스 터미날까지 태워주고 헤어졌다. 8시 고속버스를 타고 차 속에서 내다보니 내가 지난 능선이 (묘적봉 도솔봉) 제2연화봉 천체관측소 제1연화봉 비로봉 국망봉 상월봉 갈곶산 선달산으로 이어지면서 파노라마처럼 쫙 보였다. 백리가 넘는 산길을 혼자 당일에 걸었다고 생각하니 대견하고 감개무량하였다.

썬글라스를 쓰지 않고서는 쳐다보기도 힘들게 휘황찬란한 산봉우리와 능선을 거치고 깊숙한 안부를 지나며 어둠컴컴한 울창한 숲속의 계곡을 내려다보고, 이상한 바위를 딛고 맑은 샘물가에 내려가 마실 물을 보충하며 백두산을 향해 백두대간을 왔다.

이름 모르는 아름다운 야생화를 물끄러미 바라보고, 푸른 잔디를 밟으며 정정한 나무를 올려보고 온갖 새들의 노래 소리를 들으며 뭍짐승들이 판 땅의 구덩이를 넘어서 왔다.

발밑의 절벽을 내려다보며 공포의 감정을 느끼면서 능선을 지나며, 높고 험한 정상을 바라보고 대망과 도전의 충동을 받고 용기를 내어 어려움과 괴로움을 이기며 인내심과 극기력으로 정상에 오르면, 승리의 감격과 정복의 환희를 맛보며 서로 정상에 오른 기쁨을 참을수가 없어 정상주를 한잔씩 나누며 기쁨을 나누기도 하였다.

우리나라에는 어느곳에 가 보아도 병풍같은 산들이 우리들의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시간이 있고 마음만 먹으면 언제든지 산에 오를수 있는 것이 우리의 환경이다.

시원한 약수 한 그릇을 마시며 정신이 바짝 나서 바라보는 산과 계곡은 세속에 빠진 자신을 돌아보고 마음을 깨끗하게 씻고 비우는 것 같았다. 대자연의 신비로운 품속에 안겨 꽃과 나무, 오솔길과 약수터, 산 소리와 물소리와 바람소리와 새소리의 조화를 만끽할수 있으니 심신의 건강과 조화를 동시에 추구할 수 있었다.

그래서 나는 가끔 시간이 나면 몸과 마음의 건강을 되찾으러 등산을 한다.

 

 

백두대간 제32구간: 박달령-구룡산-곰넘이재

1999년 8월 21-3일

남경희(20회)

가을 씨즌 백두대간 종주를 재개하다. 구룡산 구간이다.

밤 11시 반 출발. 다음날 새벽 3시 반 오전 약수에 도착하여 1시간 가량 잠을 잔 후, 5시에 아침을 먹다. 속이 불안하여 제대로 먹지를 못하다.

6시 출발. 산사태 때문에 봉고차가 박달령까지 올라갈 수 없다 하여 임도를 따라 1시간 걸어 올라가다. 며칠 전의 폭우로 곳곳에 산사태가 나 있었다. 지반이 상당히 무르다. 걷기는 좋은 길이다. 이곳은 한반도에서도 오지에 속하는 곳답게 나무가 울창하고 계곡이 깊다.

후미를 기다린 후 7시 50분 출발, 옥돌봉 또는 옥석산, 도래기재, 구룡산에 12시 반경 도착, 구룡산 오르는 길은 선달산과 비슷하게 1시간 가까이 손과 얼굴을 할퀴는 잡목을 헤치며 계속 오르는 길이다. 언제 이 경사길이 끝날 것인지만을 기다리며 오른다. 그래도 시간이 차면 오르게 될 것이다. 거의 신체를 혹사하는 것임에도 기꺼이 가파른 산을 오른다. 얼굴에서 비오듯 떨어지는 땀방울을 훔쳐대면 묘한 쾌감이 느껴진다.

등산은 자연상태에서의 동물들의 노동과 같이 먹이를 얻거나 포식자를 피하는 등의 구체적 소득이 없으니, 노동의 본질에 반하는 것임에도 오히려 순수한 노동으로 여겨진다. 사람들은 킬리만자로을 오를 이유가 있을 것이나, 표범은 눈만 덮힌 그 높은 산을 오를 이유가 없다.

오르는 길에 평지가 단 한 걸음 일미터도 없이 완전한 비탈길이었다. 베테랑들도 오르다 완전히 지쳐 나가떨어진다. 한참을 쉬다가 다시 오른다. 모두들 올라와서는 헥헥거리며 털썩 주저 앉는다. 땀이 뚝뚝 떨어진다. 모든 상념은 사라지고, 철저한 노동, 신체와의 싸움, 깨끗해지는 기분이다. 기계적으로 움직이는 다리와 무릎, 그리고 끊임없이 충직하게 펌프질을 해대는 심장, 그 박동소리, 그리고 줄줄 흐르는 땀에서는 나의 신체 내부의 내분비선의 활동을 확인할 수 있다. 나는 나의 신체의 움직임을 느낀다.

하지만 내가 몸만을 지니고 있다면, 이런 등산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인간 아닌 동물들은 생존의 필요와는 상관이 없는 이런 류의 노동을 하지 않는다. 오직 인간만이, 정신을 지닌 인간만이 이런 등산을 하는 것이다. 올라야 한다는 생각이 나의 신체를 이끌어가고 있는 것, 그러니 등산은 몸으로 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의지로 하는 것이고 신체를 그 의지를 지원하고 있을 뿐이다.

힘든 등반을 하면서 무념무상이 된다고, 아무 생각도 없다고 하지만, 정말로 힘든 등반에서는 생각으로 걷고 오르는 것이다. 생각이 자신이 오르고자 하는 높은 봉우리로 나의 무거운 다리와 몸을 끌어 올리며 혹사시키고 있다. 그러나 그 생각은 내용이 없고 단지 지향성, 정상에의 의지만을 지닌, 그야말로 순수의지이다. 단지 이 힘든 노동을 빨리 끝내고 정상에 오르겠다는 생각만으로 오른다. 이런 점에서 가파른 산을 오르면서의 생각은 지극히 단순화 되어 있고, 오르겠다는 의지 이외에는 들어설 틈이 없다는 점에서 무념무상이랄 수 있는 측면이 있기는 하다.

나는 간혹 가파른 산의 등산은 禪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한다. 참선을 하는 경우에도 단 하나의 생각, 모든 생각을 단념하겠다는 생각만은 있다. 물론 경지에 오르면 그런 생각도 없어질 것이기는 하나.

대간을 오르면서는 이런 고된 체험을 많이 한다. 눈과 얼음이 덮힌 회양산의 절벽길에서 나무뿌리와 밧줄을 잡고 오르며 다리가 후들거렸던 기억, 또 조령산 하산길 절벽에서 밧줄에 매달려 동기녀석이 비명을 지르고 모두들 내려가지도 오르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난감해 하던 기억들이 새롭다. 그리고 나서 과연 이렇게 험한 대간 주행을 할 수 있을 것인지 회의를 갖으며, 지도을 보고 등반기록서를 읽으며 열심히 연구하며, 계속할지의 여부를 가늠하기도 했던 것이지만.

등산은 이 맛으로 하는 것이리라. 자신의 인내력과 담력과 지구력을 시험하며, 몸과 마음이 지탱할 수 있는 한계까지 버티어 가면서, 의지력으로 종주능선을 완주할 때의 성취감, 그리고서 부는 바람에 땀을 식히면서 쉬는 기분 때문에 등산을 하는 것이다.

구룡산에서 점심겸 간식, 나는 속도 좋치 않아 간식으로 때우다. 선배분들이 휴대용 냉장고에 싸온 칵테일이며 맥주, 그리고 정상주를 한잔씩 안기며 선후배 동문들에게 정성을 베푼다.

구룡산 내려가는 길 역시 온통 얼굴, 손을 긁어대는 잡목들이다. 길은 겨우 나있으나, 백두대간을 하는 사람들 이외에는 사람들이 거의 다니지 않은 길이기 때문일 것이다.

곰넘이재에 2시 도착, 1시간 가량 내려와 봉화, 애당마을에 3시 도착하다. 하산길 역시 오지답게 한적한 계곡길이 길게 뻗어 있다. 하산 중간 계곡에서 옷을 다 벗어던지고 차가운 물에 들어앉아 호젖하게 목욕을 하다. 여름의 땀을 모두 씻어보내는 기분이다. 내려오니 계곡 옆 간이 정자에서 맥주들을 마시고 있다. 가게는 없었으나 생각 깊은 후배가 미리 내려와 아래 마을에 가 장을 봐온 모양이다. 한참을 유유하게 목욕까지 하며 내려왔는데, 10여인만이 내려와 있다. 1시간여를 기다리다 3명이 사고가 났다는 소식, 쥐가 나서 걷지를 못해, 마을에서 트럭을 수소문하여 올려 보내다.

봉화군 애당 마을로 내려와 후미를 기다리며 술을 마시고 라면으로 식사를 하다. 아침도 시원치 않은데다 점심도 거의 굶었고, 7-8시간의 산행 후이었으니 라면맛은 그 어떤 요리보다 맛있었다. 게다가 시원스런 토란잎이 추석이 다가오고 있음을 알리는 시골의 앞마당이라. 아주 오랜만에 초간장에 담근 양파장아치를 먹어보다.

우리가 라면상을 벌이고 있었더니 여기저기서 사람들이 몰려 들어 멍석 한 자리를 만들어 술과 이야기판이다. 그런 모습들이 재미있고 흥겹다.

백두대간 종주는 몇 가지 특징이 있다.

백두대간 종주는 한국에서만 할 수 있는 산행의 방식일 것이다. 이렇게 한 줄기 대간이 국토 전체를 관통하고 있으며, 그 능선이나 봉우리가 사람들의 접근을 허용하는 그런 나라는 흔치 않을 것이다. 대간은, 홀로 있으면 이름 없이 존재했을 많은 봉우리들을 대간에 끼어 이름을 얻게 하고 사람의 방문을 기다리게 하는 너그러움을 지니고 있다.

능선을 끝까지 가, 다음 구간의 능선과 이어야 하므로, 보통의 산행보다 길고 힘이 들다. 대간을 타다 보면 산넘어 산 그 넘어 또 산이라는 말이 실감이 난다. 한반도, 특히 대간의 주변에는 그렇게 산이 많으며, 능선은 봉우리의 연속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대간 종주는 첩첩의 산중을 가는 것이어서 외로울 듯하나, 곳곳에서 새로운 능선들이 나타나 내가 달리는 대간길에 동반해주고 있으며, 가끔은 만나서 봉우리를 이루기도 하기 때문에 한국 산들의 능선은 외롭지 않다. 그래서 마치 산들을 벗삼아 함께 등반을 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실제로도 그러하리라. 나는 여러 사람들과 함께 종주를 하고 있기는 하나, 나의 눈에 더 깊이 들어오고 내가 대화를 나누는 것은 그 동료들이라기보다는 산들이므로.

방금 산을 달린다 했으나, 실제로는 능선의 인도를 받아 힘들게 가쁜 숨을 몰아쉬며 오르락 내리락 하며 걷는 것이다. 그럼에도 대간을 걷다보면 달린다는 느낌이 든다. 그 이유는 남에서 북까지 선을 이어서 걷는 형국이 마치 열심히 달려야만이 다 걸을 수 있을 것 같은 생각이 들고, 실제 마음으로도 달리는 마음으로 걷기 때문일 것이다. 게다가 이번 팀원들은 모두 베테랑들이어서 그런지 1-2 시간 이상을 달린 후에야 쉬는 강행군을 하니 숨을 몰아쉬며 달리는 형국이다.

밤새 달려와 잠도 설친채 새벽부터 산행을 시작한다. 밤새 달려와 하는 대간 산행이 피곤한 스케줄이기는 하나, 새벽산행의 묘미를 맛보게 한다. 대간 종주를 하면서 비로서 나는 새벽산행의 묘미를 알게 되었고, 더 깊은 산의 맛을 보고 산의 향기를 맡을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자연의 시작, 생명의 낭낭함을 알리는 새소리들, 풀의 향기, 잡목들이나 억새잎마저 영롱하게 하는 이슬, 아침 태양이 나무 사이로 쏟아대는 햇살.

한국 지형의 특징을 잘 보고 체험할 수 있는 산행이다. 한국의 산이 마을과 함께 공존하고 있음을 알 수 있게 한다. 보통의 산행과는 달리 고개를 무수히 많이 넘는다. 대간이 지리상의 등산로, 자연의 일부인 것과는 달리, 대간을 가로지르는 고개는 사람의 길, 마을의 일부이다. 대간은 봉우리와 봉우리를 잇는 능선임에 비해, 고개는 마을과 마을을 연결하는 통신망이다. 산은 능선으로 오르다가 더 이상 오를 곳이 없으면 봉우리가 된다.

백두대간을 하다보면, 미내치, 갈곳산, 늦은목이 등 특이한 이름의 지명들을 많이 만나게 된다. 다 유래와 역사가 있을 것이다. 그 이름의 역사에는 사람살이의 사연과 모습이 담겨 있다. 그 어떤 지명이건 사람이 살면서 붙인 것이기에 단지 땅만을 물리적으로 보고 붙인 이름은 없다. 산의 물리적인 모습은 여러 가지, 무수히 많기에 그런 식으로는 산이나 고개는 물론 그 무엇의 이름도 지을 수 없을 것이다. 나름의 사연과 이야기가 있을 것이다.

백두대간의 묘미는 수많은 고갯길을 가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연속 종주가 아니라, 일주일, 이주일 단위로 서울을 오가면 백두대간을 종주하다 보면 중간 고갯길을 내려오고, 다시 올라가는 일을 반복해야 한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이를 낭비라 생각하지만, 달리 생각하면, 이런 식으로 대간을 따라 오르는 것이 살아있는 백두대간을 체험하는 것, 사람들의 흔적이 있는 대간을 접하는 것이다. 고갯길은 넘나드는 사람들이 없으며, 대간 주위에 마을 형성되어 서로 교류할 필요를 느끼지 않으면 형성되지 않는다. 그러므로 사람의 발길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한국의 산들이 산 홀로 있는 것이 아니라 마을과 함께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 장소이다. 백두대간은 우리 땅을 사랑하는 독특하고 풍부한 방식, 그리고 상당한 노동력의 공을 들이는 방식이다.

그 고개 초입의 마을들을 무수히 방문하여, 새벽에는 국 한그릇을 얻어먹고 오후면 내려와 여유가 있으면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그 아래 마을에서 멍석을 깔고 술을 한잔 할 수 있는 귀한 기회를 갖는다. 지난번의 오전약수, 애당마을. 등. 이런 곳에서 자리를 펴고 술 한잔 하는 기회를 일부러는 갖을 수 없다. 누가 술 한잔 하러 이 오지를 일부러 방문하겠는가?

등산 후의 식사자리나 상경길의 버스 안에서는 흥겹고 정겨운 뒷풀이판이 벌어진다. 40에서 60까지의 동문들이 마치 10대 후반의 고등학생들 처럼 격식을 느슨하게 하고서 편안한 기분으로 이야기의 꽃을 피우며 술을 주고받는다. 그럴 때면 각자들 비장의 술들을 꺼내 놓는데, 술들의 종류가 다양하기 그지없다. 정상주로 마시는 양주에 소주, 맥주는 기본이고, 인삼주, 매실주, 구기자술, 즉석의 더덕주, 막걸리, 와인 쿨러, 레몬소주. 소맥는 짐작할 수 있을 것이고, 이름도 근사한 막사이사이는 탁하고 무거운 막걸리와 맑고 탄산가스로 가벼운 사이다를 혼합한 것이다. 주고 받는 술들 중 우리를 가장 취하게 하는 것은 무엇보다도 갖가지 술에 선후배의 정을 섞어 주는 동문칵테일일 것이다.

학교를 졸업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다양한 사람들과 식사하거나 술을 함께 마실 기회가 있었을 것이다. 산을 좋아하는 선후배 동문들과의 식사나 술자리는 그 어떤 모임보다도 흔쾌하고 기분 좋은 자리이었다. 산에 대한 열정을 지닌 마음들이니 순수하고 호쾌하기도 하거니와, 동문들이니 마음의 혁대나 넥타이를 조금은 풀어놓고 허물없는 말투를 주고 받을 수 있다. 선후배가 연장자나 연소자로서가 아니라 형님과 동생으로, 무공해 화제인 등산에서의 무용담을 안주 삼아 술과 정을 주고받는 모습은 2-30년의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고교시절도 되돌아 간 듯한 기분이다.

 

 

백두대간 제35구간: 피재-덕항산-댓재

1999년 10월 23일

곽경호(26회)

출발하는 날 동기산우회장 J군과 밤 9시에 만나 소주 2병반을 마시다. J군은 3병째부터 거푸 마시면서 한 말을 되뇌이고 대화의 촛점이 산만해지더군. 변하지 않는 믿음이 중요하다는 말에 공감하다. DuoBack 의 모조품 단속 차 서울에 올라왔다가 나와의 약속 후 만난 것이다. 검은 양복을 쪼끼와 함께 입었고 재킷을 벗으니 굵은 어깨와 팔 근육이 와이셔츠 안에서 볼륨을 주고 있다.

관석 군과 완순 군에 대하여 말하다. 헤어지고 가다보니 모자가 없다. 다시 찾으러 가다가 현철수, 홍기룡 선배를 마주치다. 포장마차로 들어가 앉으며 오다가 들르라 한다. 잠자기 위해 한잔 걸치려 가는 것일까. 포장마차는 정겹다 저럴 때 지나가다 한 잔하는 그 맛. 出과 入에 비중이 없이 쉽게 앉았다가 빨리 일어날 수 있는 (에라 오늘 포싸롱으로 누굴 불러야지) 그런 곳이다.

산행기를 쓰는 오늘은 10월 29일 정오. 글 속의 시간은 10월 23일 자정이나 며칠 지나 산행기를 쓰는 것은 맛있고 즐겁다. 아침에 25분 간 3일째 학교 운동장을 7바퀴 구보하니 피곤함이 충분한데도 몇 일 전을 상기하며 이 글을 쓰는 것이 편안하면서도 시원하다.

모자 찾아가며 우유 200ml 두 병, 생수 500ml를 사 갖고 버스 앞으로 가니 사람이 별로 없다. 밤 11시 출발인 줄 알았는데 11시 30분이란다. 해일군은 좋겠다. 내일 바다낚시를 가족들과 함께 간다니.

승차후 일찍 잠들었다. 옆의 신기식선배가 깨운다. 새벽 4시 30 분. 먼저 내린 분들이 밖에서 추워한다. 그럭저럭 5시 못미처 피재에서 출발한다. 1시간이 지나도 몸이 warmming up이 안된다. 2시간쯤 되서야 두터운 상의를 벗고 반팔로 갈 수 있었다. 동트기전 아침 노을이 아름답다. 후미 조가 박정일, 김진수, 김인웅, 그리고 나. 헌데 중간에 임도가 연결된 것을 박정일선배가 발견하였고, 그리로 사람들이 갔을 가능성에 높다 했다. 조금 지나 그 쪽에서 인기척이 들린다. 더 가다 보니 야호 소리. 우리도 화답하나 위치가 확인되지 않는다. 꽤나 멀리서 들린다. 얼마 후 10여 명을 후레쉬로 인도하며 제길로 안내했다. 그후 또 50분이 지나 선두조가 돌아왔다.

아침을 싸오지 못해 이 분 저 분 것을 얻어 먹다. 완순이 반찬은 깻잎, 멸치, 마늘절임 등 아주 담백하다. 그리고 우유 한 곽을 마시다. 가을을 만끽하다. 실컷 낙엽을 밟으며 낙엽 속에 있어 황홀한 기분이 밀려오고 있다. 넘실넘실 산줄기가 겹겹지고 그 너머론 동해시내와 수평선이 보인다. 등대와 선박이 또렷하다. 지하철에서 1000원 주고 산 손전등이 유용했다. 새벽에서 10 시경이 될 때까지 산 사이 골에서 올라오는 물안개가 선명하다. 덕황산, 황장산 모두가 높은 산맥 속의 산인지라 뚜렷한 산의 모습이 없고 맛도 없다. 그만치 우린 높은 산 등줄기를 가는 것이다.

점점 가슴이 북받친다. 우린 다음 두타산, 청옥산을 넘어 강릉시로 넘어 가고, 속초 설악이 기다리고 더 지나 우리의 행군은 끝난다. 다른 곳과 비교되는 절경이 어디인가를 우린 확인할 것이고, 그 자극에 우린 알면서도 또 몸서리칠 것이다. 기다려라 산아.... 우린 신성한 행진이라 여긴다. 그를 거부하는 자를 거부하고 찬양하는 자를 사랑한다. 별 것도 아닌데 어찌 보면 뚜렷한 가치도 없는 일인 것을. 또 어찌보면 삶의 또하나의 형태인데도 막무가내로 좋아한다. 그 이유를 드러내고 분석하고 싶지 않고 현상 그 자체로 남고 싶다.

중간 환선굴에서 올라온 등산객들과 만나다. 포천에서 왔단다. 절벽에 붙은 단풍들이 불타오른다. 김준호선배가 사진찍다. 그위에 평전이 보인다. 색다른 풍경이다. 대단위 고냉지 채소밭이 나타나기 전 점심도 얻어 먹고 가는데 그 중 귤이 참 맛있다. 정영선배가 왼쪽 허벅지 안쪽 속 근육이 쥐나다. 김진수선배와 맛사지를 하고 배낭을 대신 메고 남은 4시간을 가다. 고마와 하시니 민망하다.

버스에서 S선배가 그 위 선배들에게 농담이 너무 지나처 야자 식으로 되면서 상대방이 받아들이지 않는 것을 깐죽이다. 그 덕에 그 옆자리 구석에 앉은 나는 주목을 덜 받아 술을 덜 받았다. 양명륭선배가 한참 후에 일어나 갑자기 "난 이런 건 못참겠다"며 "첫째, 선후배의 질서, 둘째, 엘리트의식이 없이 막무가내한 행동은 참을 수 없다"고 외친다. 김인웅선배, 성두섭선배 등이 분위기를 가라앉히려 하자 앞자리에 있던 P선배가 그 호색동안을 찡그리며 "어느 놈이 뭐라 하나. 얘가 뭐 틀린말 했냐"며 두둔하며 나서고 그것으로 이 어색한 상황은 끝났다.

승차 전 술자리에서 장헌수, 김진수선배 등 여러분이 계신 자리에서 완순군이 역시 우리 26회 대표라고 추켜 세운 탓인지 버스 안에서 신이 났다. 마이크 들고 사과를 하고 '타는 목마름으로' 노래를 나름대로의 창법으로 부른다. 관석이는 앞쪽 떨어진 자리에서 가만히 있고, 용기는 오지 않는다. 의승이도 조용하고 두섭형과 웅배형이 나에게 자꾸 바람을 넣는다. 왜 가만있냐고.

회비는 3만원. 식사는 따로 없고 하산 후 댓재에서 컨테이너로 만든 임시용 가게가 있어 좁쌀 막걸리, 캔 맥주, 소주, 오뎅 등을 먹다. 저녁 5시에 출발해서 7시간 만에 귀경했는데 차라리 반대 방향으로 가서 생선회나 먹고 늦게 막히지 않는 시간에 갔으면 더욱 좋았으리란 아쉬움이 남는다.

 

 

백두대간 39구간: 삽당령-화란봉-닭목재

2000년 3월 26일

김관석 (26회)

2000년을 맞이하여 처음 가는 백두대간 산행이다. 아, 겨울동안 얼마나 백두대간 산행이 재개되기를 기다렸던가? 하지만 장헌수 백두대간 등반대장께서 이틀전 모친상을 당해 못나오셨다. 그리고 부등반대장인 이선길형도 따라서 안나왔다. 나는 장헌수 선배님 없이 오늘 혼자서 선두에 서야 하는 날이다. 문제가 없을까하는 걱정이 앞서서 그랬는지 올해 백두대간 첫 산행이라 그랬는지 잠을 설쳐서 오늘따라 늦잠을 잤다. 그래서 6시30분 출발인데 5분 이상 지각을 해서 다른 분들에게 죄송했다. 그렇지만 공교롭게 버스들도 10여분 늦게 도착하였다. 어쨌든 여러분들께서 반기신다. 근래에 동문 산우회에서 해외산행으로 안나푸르나 베이스 캠프에 같이 다녀오신 이승옥 선배님께서는 고맙게도 거기서 찍은 비디오 테이프를 주셨다. 정말로 산행에 열중하시는 노선배님이시다. 오늘도 여는 때와 마찬가지로 두 대의 버스에 최치석선배님의 지시에 따라 기수 별로 나누어 탔다. 처음 보는 얼굴들이 꽤 많았다. 아마도 오늘 산행이 쉬워서 그런가보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삽당령에 도착하여 최치석선배로부터 무전기를 받고 출발한 시간은 10시였다. 얇은 셔츠와 팔 없는 조끼를 입었더니 조금 쌀쌀하게 느껴진다. 반면에 내가 보기에는 많은 사람들이 지나치게 옷을 껴입고 있었다. 우리는 보통 1시간을 가야 쉬니 중간에 땀이 나면 선두는 옷 갈아 입을 시간도 없으니 말이다. 시작하는 곳에 관청에서 세운 백두대간 산행 안내 게시판이 있더니 산길도 누군가가 손을 본 것 같다. 지나치게 다듬어진 느낌이다. 월간 {산}이 발행한 백두대간 종주산행에는 산행시간이 애매하게 써있었다. 코스도 임도를 따라서 가라고 되어 있었는데 실제로는 리본을 보고 작은 야산길을 갔다. 한참 가니 임도를 만났는데 건너가도록 리본이 매어 있었다. 고만고만한 흙길에는 낙엽이 깔려 있었고 간혹 얼음이 밑에 숨어있기도 했다. 아! 포근한 산책길이다. 한 손에는 지도를 들고 목에 건 나침반을 계속 확인하면서 걸어갔다. 만일을 위해 오른쪽 어깨에 걸은 GPS를 미리 켜 두었다.

아마도 여기에 GPS 스토리를 이야기 해야 할 것 같다. 백두대간 초기에 13회 선배님들께서 미국에 사시는 동기 김명준 선배님이 길을 잘 찾으라고 GPS를 받았다고 했다. 그 신기한 기계를 연구한 바, 미국에 사시던 분도 못 다루겠다고 했다. GPS란 Global Pointing System의 약자로 위성항법장치라도 한다. 그것은 12개의 인공위성으로부터 신호를 받아 현재의 지점을 위도와 경도로서 계산하여 그래픽으로 보여주는 기계인 것이다. GPS를 연구하여 몇 번을 헷갈리는 길을 찾아내었다. 그래서 의례히 나는 GPS를 들고 등반대장과 함께 선두에 서는 것이다. 왼쪽 어깨에는 워키토기, 오른쪽 어깨에는 GPS. 그래서 20-30m 오차로 특정 지점을 찾아낼 수 있다. 그래서 처음 가는 길이라도 앞장서서 등반대장과 함께 찾아보는 것이다. 물론 우천시를 대비해 얇은 비닐에 싼 자세한 지형도와 나침반도 필수로 갖고 다닌다. 그렇지만 이미 많이 붙은 백두대간 리본이 가장 쉬운 길 찾는 수단이기는 하다.

앞장서서 출발을 하니 몇몇 사람들이 너무 빨리 가는 게 아니냐는 뒷소리가 많다. 아마 막내 후배가 혼자서 앞장서니 투정부리시는 것은 아닐까? 아니면 내가 페이스 조절을 잘못하는 것은 아닐까? 이전에도 장헌수 대장님이 빠지시면 나에게 선두가 너무 빠르다는 말을 하시는데 내가 보기에는 평상시에 느낀 바를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렇지만 선두를 서는 입장에서는 전체를 어느 정도는 속도를 내게 하지 않으면 예정된 일정을 못 맞추게 된다는 생각이 있는 법이다.

출발 후 2시간 정도가 지나 약간 가파른 곳을 오르니 석두봉(982m)이다. 시야가 트여 경치가 제법 좋다. 가슴이 모처럼 후련하다. 풍경사진을 몇 장 찍고 있는 데 옆에 있던 규도형이 카메라를 건네며 자기 얼굴도 찍어 달라고 하였다. 늦게 도착한 사람들은 거의 쉬지도 않고 지나간다. 나는 풍경 사진을 찍던 안 찍던 경치가 좋은 곳에서 쉬는 것을 좋아한다. 그렇지만 날씨가 안 좋으면 다른 사람들은 꼭 경치가 없는 우묵한 곳에서 쉬기를 좋아한다. 오늘도 결국 길을 가늠하기 위해 가끔 GPS를 보아야 했다. 항상 그렇듯이 길이 고만고만하면 내가 어디에 있는지를 알기 정말 힘들은 것이다. GPS가 30m 정도의 오차를 보이며 석두봉의 위치를 알려주었다.

석두봉 아래 5분정도 간 거리에서 점심식사를 하였다. 바람 안부는 장소였다. 정재우 단장님께서 같이 먹자고 부르셨다. 단장님 부부와 같이 오는 정용순, 이경자 두사람과 명륭이형과 같이 점심을 먹는데 고기 반찬이랑 후식들이 너무 맛있어 좋았다. 35분 정도 식사를 한 후 출발하였다. 1006미터봉 바로 아래서 비교적 가파르기는 했는데 뒤에서 쉬자는 소리가 있음에도 조금만 더가면 경치 좋은 곳이 나올까 하는 욕심에 가다가 결국은 한시간 5분 정도 가서 쉬게 되었다. 그러자 단장님께서 곧장 쫓아오셔서 너무 빠르고 55분 운행하면 쉬어야 하는데 하는 야단과 당부의 말씀을 하셨다. 후미와 교신해보니 20분 정도 차이가 나는 것 같다. 단장님께서는 엄격하시고 산행 경험이 많은 분이라 야단이 매섭게 느껴진다.

화란봉은 1069미터로 오늘 산행중 가장 높은 곳이 되는데 이곳으로 오르는 비탈이 제법 가팔랐지만 1006미터봉에서 빠른 걸음으로 25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여기서 닭목재까지는 40분 정도 걸릴 것이라는 예상이어서 김승남 선배님이 주시는 정상주를 부담없이 받아 마셨다. 산에 왔으니 하산은 서둘 필요가 없다. 허리가 아프다는 동기 권용기도 잘 오고 있다는 교신이다. 후미와의 차이는 약30분 이상 나고 있으니 일부러라도 시간을 보내기 위해 쉬었다.

충분히 머물렀다 싶은 후 화란봉에서 내려오는데 성두섭형을 만났다. 길옆에 양지바른 곳에 앉아서 오라고 손짓을 한다. 앉아서 기(氣)를 받고 있으며 우리도 받으라는 이야기일 것이다. 백두대간 종주단원들 중에서 별난 사람들 중의 한 사람으로 기의 존재를 믿으며 의술에게까지 연관시킨다. 10여분을 더 내려가니 양지바른 무덤가에 선배들이 모여있어 첫 산행기념으로 한 장 찍었다. 내 카메라는 슬라이드 필름을 넣고 다녀 특별한 경우 아니면 인화하기가 곤란하지만 스캐닝해서 인터넷에 홈페이지에 싣기 위한 용도이다. 두섭이형이 와서 또 기공 이야기를 하길래 믿져야 본전이라는 생각으로 이 년전에 삐끗한 허리에 기공을 행해 달라고 하였다. 그러자 무덤 아래쪽으로 누우라 하더니 꽤 아프게 누르고 꺾어댄다. 그래서 나는 작은 비명을 질러댈 수 밖에 없었다. 약간 웃음도 나왔다. 그러자 옆에 계시던 이익효고문님 말씀이 들린다. "야, 두섭이한테 몸을 맏기는 무모한 사람도 있다"고 놀려대셨다. 그래서 모두들 무덤가에서 웃어댔다.

닭목재에 내려오니 3시25분 경이었다. 헌병감으로 자처하시는 김일웅 선배님과 몇 사람들이 화란봉에만 올라가고 내려와 동네 마을로 가서 청산별곡주라는 동동주를 한 궤짝 사다 놓으셨다. 오늘은 모두 지치지 않고 잘 내려왔다. 아마 이제까지 중 가장 수월했던 구간이란 생각이 들었다. 장헌수 대장님 없이 혼자서 선두에 서기에는 무리가 없어 좋았다. 전에 혼자 선두에 있었을 때 구간이 길고 힘들었는지 선배님들의 짜증을 감수한 적이 생각 났다. 한번은 그냥 마음대로 빠른 사람들을 좇아 앞서서 갔다가 뒤에서 일행을 놓친 형수님들이 집단으로 길을 잘못 들었던 적도 있었다.

버스가 오후4시 5분에 출발하였다. 짐작한대로 사람들이 술들을 많이 마신다. 산행이 쉬운 날은 술을 많이 마신다. 산행이 힘들면 잠을 잘 자고. 백두대간 초기에는 돌아오는 버스에서 인사겸으로 술을 따르다가 주는 술 받아 마시고 필름이 끊어진 적도 몇 번 있었다. 사람들이 그때의 증상은 선배님들 말을 막고 떠드는 것이었다고 했다. 친구 권용기의 충고를 듣고 조심도 했고 등산으로 체력이 좋아졌는지 초기 이후로는 필름도 끊어지지 않고 실수도 않게 되었다. 그랬더니 문제는 다른 취한 사람들 쳐다보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하루에 한 두사람은 거의 실수를 한다. 어떨 때는 화가 많이 나기도 했다. 그러다가 미운 정 고운 정이 다 들었는지 이제는 서로 형제간 같아 취해도 미운 실수는 거의 없다.

서울 압구정동에 도착하니 밤9시30분이다. 2000년의 첫 백두대간 산행에 거의 막내 격인 내가 선두로서 60여명과 함께 무사히 다녀온 오늘의 백두대간 산행이 나에게 특별한 기억으로 남을 것이다.

 

 

백두대간 제42구간: 진고개-신배령-응복산-구룡령

2000년 6월 10일-11일

정재우(7회, 백두대간 종주단장)

내일(6월10일)은 백두대간의 오대산 구간을 이승옥, 이익효 고문과 함께 막영산행을 하기로 하였다. 적막강산 심심산중에서 이름 모를 새소리와 짐승들의 울음소리를 들으며 초여름 하룻밤을 보낼 생각을 하니 20여년 전으로 돌아가는 기분이다.

등산장비의 무게와 부피를 15Kg에 45l이하로 제한하여 짐을 꾸려본다.

6월 10일 아침 6시 20분 강변 역전 동서울 터미날에 도착하니 이승옥씨와 이익효 고문이 미리 도착하여 기다리고 있다.

우리 셋은 강릉행 첫차로 진무에 도착하여 간단히 시장을 보고, 택시로 진고개에 가니 오전 10시 30분. 날씨는 구름이 적당히 해를 가렸고 바람까지 솔솔 불어주니 산행하기에는 더없이 좋은 날씨 같다.

지형도를 펼쳐본다. 진고개가 해발970m, 동대산이 1433m 도상거리로 1.5km이다. 즉 1.5km의 거리에 고도 차가 460m이니 소요시간이 1시간 30분이 되겠다. 첫 스타트부터 가파른 길이니 보폭을 좁히며 천천히 쉬지 않고 걸어본다. 출발한지 60분 동대산 1433m의 이정표가 나타난다. 소요시간과 두로봉까지의 거리를 메모하고 물 한 모금을 마시고 동대산 헬기장을 넘어 두로봉을 향하여 발걸음을 옮긴다.

동대산을 출발한지 1시간 10분만에 차돌바위에 도착하였다. 간간이 빗방울이 떨어진다. 벗어질 듯하던 구름이 심상치 않게 짙어 가니 기분이 얹잖아진다.

차돌바위를 지난지 1시간 33분 2시 23분에 두로봉에 도착하였다. 동대산에서의 거리가 7km, 산행 출발지인 진고개로부터 8.5km에 3시간 50분이 소요됐다. 오늘의 목적지인 신배령까지는 3.5km가 남았다. 이곳에서 서남쪽으로 1시간 거리에 북대사(미륵암)가 있다.

44년전 1956년 7월 하순, 어느 날 밤의 오대산 등반시의 사건이 떠오른다. 姜君 등 초등학교 친구 4명과 함께 오대산 등반에 나선 우리 일행은 오후 5시가 넘은 시간에 상원사를 향하여 월정사 앞을 출발하였다. 선두는 전 년에 왔던 경험이 있는 姜君이 섰다. 밤 9시경 칠흑같은 밤길을 땀을 뻘뻘 흘리며 앞선 친구만 바짝 쫓는다. 계곡 건너편에는 여러 사람이 모닥불을 가운데 두고 둘러앉아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계곡의 물 흐르는 소리에 말도 못 부치고 지나쳐 간다. 얼마 후 이들이 우리 일행을 황급히 뒤쫓아 왔다. 우리 일행은 가던 발길을 멈추고 그들 앞으로 다가서려 하자 그들 중 몇 명이 뒷걸음으로 물러서며 소총의 노리쇠를 후퇴시키고 우리 일행을 겨누면서 이 밤중에 어디를 가는 누구냐고 묻는다. 영문을 모르는 우리는 상원사까지 가는 등반객이라고 태연히 대답한다. 그러나 우리는 상원사 갈림길을 지나쳐 북대사쪽으로 가고 있었다. (그 당시 북대사는 전 해 가을에 주지 스님의 피살로 빈 절로 있었음.) 오대산 잠복근무를 위해 상원사로 가던 평창경찰서 대원 4명과 주민이 우리 일행을 공비로 오인하고 우리를 쫓아 왔던 것이다. 천만 다행으로 우리들은 길을 바로잡아 경찰아저씨들과 같이 상원사로 올라가 늦은 저녁을 함께 하였다.

그때의 상원사, 북대사(지금의 미륵암) 적멸보궁, 비로봉, 상왕봉, 사고사 등등.... 그려본다.

떡과 강정으로 요기를 한다. 비구름이 잔뜩 낀 서쪽 하늘에서는 천둥소리가 요란하다. 빗방울이 잦다. 배낭커버를 씌우고 판초를 뒤집어쓰고 신배령을 향하여 출발한다. 내리막 길이 계속 이어져 힘은 덜 드나 비로 인해 산길이 미끄러워 조심스럽다.

빗속의 강행군!

온 몸이 안팎으로 땀 범벅 빗물 범벅. 판초자락으로 흐르는 빗물은 바지를 적시고 등산화 발목으로 스며들어 질척거린다. 이윽고 막영지인 시비령에 다다랐다. 시간은 오후 5시. 숨도 돌리지 않고 빗속을 2시간 달려온 것이다. 비는 그칠 줄 모르고 내린다. 2시간 후면 어두워 질 터인데 우중에 텐트를 치고 야영을 해야 할지, 아니면 조개골로 내려가 민가를 찾아야 할지 망설인다.

20-30분 지났을까? 서편 하늘에 구름이 벗어지며 빗줄기가 줄어들더니 뜸해진다. 흘린 땀이 식으니 한기가 엄습한다. 이익효고문이 버너를 꺼내 불을 피고 수통에 남은 물을 모아 끓이고 북어국을 끓여 마시니 살 것 같다. 이승옥씨와 이 고문이 물주머니와 코펠을 들고 물을 뜨러 조개골 쪽으로 내려간 사이 나는 텐트를 치고 젖은 옷을 갈아입었다.

짐의 부피와 무게를 줄이려 Rain Fly를 두고 온 것을 후회한다. 대용으로 판초를 덧씌우니 많은 비만오지 않으면 잠자리는 별 걱정을 안 해도 되겠다.

두 친구가 물을 길어왔다. 진무에서 사온 돼지 항정을 안주로 후라이펜에 구워 위스키와 소주를 몇 잔씩 돌리니 추위가 싹 가신다.

저녁을 먹고 잠자리에 드니 밤 9시 제발 큰 비는 오지 말아야 할텐데...

침구가 시원치 않아 추워서 잠을 깼다. 새벽 1시 17분 하늘엔 별이 총총 구름 한 점 없이 개였다. 여벌의 옷을 챙겨 입고 마음놓고 다시 잠을 청한다.

새벽 5시. 오늘 새벽 4시경 출발예정인 본 대와의 통화를 위해 휴대전화를 열었더니 배터리가 다 되어 불통이다. 5시 뉴스에 서울기온 16.4℃, 내륙지방 곳에 따라 소나기 우박 돌풍이란다. 동쪽 산과 바다는 솜같이 운해에 묻혀있다. 이승옥 동문은 날씨가 좋아지겠다며 기분이 좋은 표정이다.

산우회 전 회장 이익효고문은 환갑 진갑을 지낸 나이에도 세 사람 중 막내(?)가 되어 단지 후배라는 이유로 취사에 설거지를 도맡아 한다. 쓰레기 봉투까지 자기 몫이라고 챙긴다. 선배들에게 깍듯하고 후배를 극진히 아끼는 성품이 존경스럽다. 백두대간 산행의 즐거움은 이런 데도 있었다. 우리 서울고 동문 산우들은 이러한 정신과 전통이 배었으면 한다.

아침식사를 끝내고 출발준비를 서두른다. 젖은 옷에 젖은 텐트를 꾸리니 가벼워야 할 짐이 더욱 무겁다. "아침 7시 30분 출발" 쪽지를 남기고 응복산을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8시경 ⁘1210봉을 지나 만월봉을 향했다. 짙은 가스로 시계가 좋지 않으나 등산로는 뚜렷하여 진행방위각만 확인하면서 전진하였다. 응복산에 도착한 것은 9시 11분이다. 남쪽으로 두로봉, 상왕봉, 비로봉 등 오대산의 연봉이 눈앞에 펼쳐진다.

10분간 휴식을 취한 일행은 마지막 봉우리인 약수산을 향한다. 반갑지 않은 내리막길이 35분이나 계속된다. 고도계는 300m나 내려갔다. 출발한지 3시간여 ⁘1260봉을 오르던 중 12회 후배가 따라왔다.

오르막길을 계속하여 ⁘1280봉에 올라서니 11시 5분이다. 짐을 내리고 20분간을 쉬었다가 마지막 봉우리 약수산으로 향한다. 이제부터 힘들다는 마지막 오르막구간이다. 도상거리로 1.6km 예정대로라면 1시간이면 ⁘1306봉에 도달할 것이다. 눈앞에 빤히 보이는 능선과 약수산. 우리는 힘겹게 가파른 길을 오르고 또 올라 드디어 삼각점이 박혀 있는 ⁘1306(약수산)봉 정상에 도달한 것이다. 도착시간은 12시 17분.

비에 젖은 텐트, 판초, 내복 등을 꺼내어 널어놓고 뒤따라 도착한 후배들과 마시다 남은 위스키로 축배를 들고 뒤따라 올라온 아내와 함께 가파른 내리막길을 조심스럽게 30여분 내려서니 구룡령. 화장실에 둘러 옷을 갈아입고 휴게소에 들어서니 먼저와 있던 후배 산우들이 반갑게 맞으며 시원한 맥주를 권한다.

 

 

백두대간 43구간: 구룡령-갈천곡봉-조침령

2000년 7월 14일

이승옥(8회)

나는 어려서부터 산과 자연을 좋아했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일 때문에 기회를 별로 얻지 못했으나 지금은 은퇴하여 시간이 많고 직장을 떠난 고독감을 달래기 위해 어릴 때부터 동경하던 자연에 나가곤 한다.

누가 산에 같이 가자고 하면 특별한 일이 없는 한 거절한 적이 없다. 같이 갈 사람이 없으면 가끔 혼자라도 나선다. 일단 간다고 생각했으면 비가오나 눈이 오나 바람이 부나 계획된 구간은 끝까지 간다.

산은 내가 직장에 나가거나 집에서 놀고 있거나 바뀜이 없다. 세월이 바뀌어도 언제나 늘 푸름으로 나에게 용기를 준다. 산에 오르니 영혼의 고향을 찾은 느낌이다. 인간은 흙에서 와서 한줌의 흙으로 돌아가니 말이다.

산에 오르면 푸른 하늘과 어울리는 짙은 녹음의 파노라마가 눈앞에 펼쳐지곤 한다.

숲을 안고 구름을 이고 우뚝 솟은 봉우리

그러나 어느때는 산자락에 짙은 운무를 거느리고.....

나는 동문산우회가 추진하는 백두대간이 자랑스럽고 꼭 완주하고 싶다. 사정이 생겨 참석 못하면 다음에 혼자 보충한다.

매요리-새맥이재-사리봉-복성이재

죽령-제2연화봉-제1연화봉-소백산 비로봉-국망봉-고치령

고치령-갈곶산-선달산-박달령

구룡령-갈천곡봉-조침령의 4구간을 단독 주행했다.

이중에서도 죽령-고치령-박달령 2구간은 당일 종주했다. 사정상 구룡령-조침령 구간을 동문들과 함께 할 수 없어 혼자 종주하기로 하고 우리 팀은 2000년 7월 9일에 종주했으나 나는 7월 14일에 보완했다.

7월 13일 아침 8시30분에 동서울에서 오색-양양-속초행 시외버스를 타고 12시 40분에 양양에 도착했다. 오후 1시 30분에 갈천행 시외버스를 예매하고 라면 한 그릇을 으로 점심을 대신했다. 시발점인 구룡령은 동으로는 양양군 서면 갈천리이고 서로는 홍천군 내면 명개리이며 종착점인 조침령은 동쪽으로는 양양군 서면 서림리이고 서쪽으로는 인제군 기린면 진동리이다.

인제군 기린면은 민가가 극히 적다. 내가 군 근무를 하던 58년경에는 인제 소양강변에서 포격 연습하던 목표지점이었다. 그래서 지금도 굵은 나무가 거의 없고 작은 잡목으로 원시림을 이루고 있다. 나는 58-59년도에 양구 인제 원통 서화 화천지역에서 포병 측지병으로 근무한 인연으로 이 지역에 특별히 관심이 많다. 펀치볼, UN고지, 파라호, 제3땅굴,...

서울에서 출발할 때에는 양양에서 서림까지 버스를 타고 가면 나머지 구룡령까지는 걸어서도 갈 수 있다고 생각했다. 구룡령에 가는 버스는 홍천에서는 아침 7시10분에 한번이고 양양에서는 아침 8시10분에 한번뿐이므로 산행에 시간 맞추기가 힘들다. 그러나 의외로 양양에서 구룡령 방면 버스는 갈천리까지 하루 다섯 번 있다. 버스로 양양에서 서림리는 30분 걸리고 갈천리까지는 55분 걸린다.

갈천리에서 버스를 내려 구룡령까지 걸어야지 하고 서림초교 갈천분교(폐쇄)에서 물을 잔뜩 받아가 지고 부지런히 재를 오르는데 젊은 부부가 타이탄 트럭을 타고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손을 들고 세우니 편승을 허락해 4시도 안되어 구룡령에 쉽게 올라 왔다.

어제 서울에서 구룡령 휴게소에 전화를 걸어 목요일 밤, 방 하나를 예약했으나 휴게소에는 방이 없다 한다. 낭패였다. 이곳은 구룡령 정상휴게소이고 구룡령 휴게소는 갈천리에 있단다. 어쩐지 갈천리를 지나면서 구룡령휴게소 간판을 보고 이상하게 생각하였었다.

잘 곳이 없으면 휴게소 처마 밑에서라도 자야지하고 주위를 돌아보다가 구룡령 정상에 동물 생태계 유지 구름다리 연결공사를 하는 인부들의 콘테이너 박스가 있어 문을 열어보니 잠겨 있었다. 양양 방향으로는 트럭을 타고 올라오면서 아무 곳도 쉴 곳이 없음을 보았으므로 홍천 쪽으로 쉴 곳을 찾아 내려가니 언덕 밑에 작은 콘테이너 박스가 있었다. 다행히도 문을 열어보니 열렸다. 다시 휴게소에 올라와 그곳이 누구의 무엇을 위한 콘테이너인가를 휴게소 주인에게 물으니 겨울철에 도로공사 제설인부의 휴게소라 한다. 내부에 전기시설도 있으나 단선 되어 있었다. 우선 아쉬운 대로 생전처음 콘테이너 원룸 신세를 지면서 가지고 간 침낭과 손전등을 유용하게 썼다.

날씨가 흐리니 저녁 6시인데 어둑어둑하더니 밤 8시가 되어도 어둡지가 않았다. 차량도 뜸하고 구룡령을 오르내리는 차량들의 액세러레이터와 브레이크 소리에 밤잠을 설치고 새벽 2시에는 누워있기도 지겨워서 인적이 없는 휴게소 주의를 돌다가 4시에 구름다리를 건너서 일행들이 지나간 그대로 가리라고 생각하고 손전등을 켜고 출발했다.

4시 반쯤 되니 먼동이 트기 시작하고 5시가 되니 새들도 지저귀며 나를 반기고 이제는 손전등도 임무완료를 했다.

운무속을 거쳐 산과 산 사이를 지날 때는 마치 구름 위에 앉은 신선이 된 기분이었다. 맑은 하늘과 섬같이 보이는 산봉우리와 물결치는 듯한 구름바다가 함께 어울려 멋진 한 폭의 동양화를 그려내었다. 아침 햇살 사이로 드리운 나무 그림자가 곱기만 하였다. 오가는 구름사이로 나무 그림자를 무참히 짓밟고 지나치지만 푸른 풀밭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도 하나의 엄연한 존재이고 보면 어느 때에는 사뭇 애처로운 감도 들었다.

고갯마루에 오르니 가끔 산새들이 부지런히 무언가 물어 나르는 모습도 보였다. 아마도 어린 생명을 키우기 위해 먹이를 물어가고 있는 것이 아닐까? 내가 이 햇살을 즐기듯이 산새들도 맑은 아침 햇살을 쏘이며 무럭무럭 자라고 나무와 풀들도 따가운 햇살을 받으며 잘 자라겠지.

1115고지 옆을 지나니 물이 떨어진 모양이었다. 물주머니에서 물이 안 올라왔다. 아직 갈 길은 3분의 1이나 남았는데 물을 구할 곳은 없고 급하면 어느 계곡을 좀 멀리라도 내려가는 수 밖에 없었다.

날씨가 햇볕이 쨍쨍하지가 않아 평시 안경을 쓰고 갔는데 나무 가지에 걸려 안경이 날라 갔다. 30분이나 찾으려고 주위를 헤맸으나 허사였다. 내 시력과 실력으로는 찾아내기가 불가능하였다. 아마도 동문들과 같이 왔으면 틀림없이 누구 찾아 주었을 것이다.

10시 반이 지나 762m고지를 오르니 멀리 비포장도로가 보였다. 그러나 지도를 보니 아직 갈 길이 거의 4분의 1이나 남았다. 용기를 내어 높고 낮은 산을 계속 넘어가는데 지치고 지루하고 갈증으로 참기 힘이 들었다. 물을 먹고 아침 식사를 좀 하여야 할 터인데 물이 없어 식사도 못했다. 허기가 지고 갈증이 나서 언덕에 잠깐 누었다가 깜빡 잠이 들었다. 10분이나 지났을까 눈을 뜨니 자고 있었고 방향을 잃어 저 밑으로 내려가면 되지 하고 내려가는데 방향이 남향이지 않은가? 다시 되돌아오면서 작은 산을 두어 개 넘었는데 리본도 안보였다. 시간이 벌써 11시50분이라 김관석동문에게 휴대전화를 걸어 위치를 대략 알리며 물었더니 북쪽으로 20-30분가면 조침령이라 하였다.

역시 25분 정도 가니까 비포장도로가 나오고 동쪽 서림리 방향으로 100m정도 가니까 공병대의 조침령 비가 보였다. 나는 산에서 길을 잘 모르면 휴대전화를 잘 쓴다. 산중에서 휴대전화가 안 걸리면 큰 도로변으로 나오면 요즈음은 전국 어디서나 거의 다 걸린다.

조침령 비 앞에서 배낭을 벗고 신발끈을 풀고 쉬면서 앉아 있으니 진동리 양수발전소 건설 현장 덤프트럭이 올라왔다. 손을 들어 세우고 서림리까지 편승을 부탁하니 쾌히 승낙하여 처음으로 그렇게 큰 덤프트럭에 타 보았다. 나이 든 운전기사는 친절하게도 더운데 계곡에서 찬물로 세면이라도 하고 가자며 마호병에 든 물도 주었다. 갈증이 나서 물 한 통을 거의 다 마셨다. 그리고 급경사진 언덕길을 내려가며 서림폭포 앞에서 세우면서 설명하여 주고 목적지를 물어 서울 간다니까 양양 고속버스 터미날까지 태워 주었다. 기름값이라도 주려고 하니까 극구 사양하였다.

너무 고마워서 "나도 당신처럼 좋은 일을 하면서 그때마다 당신을 위해서 기도하겠습니다"하니까 운전기사가 너무 좋아하며 "별것도 아니데 감사합니다" 하고 답례하였다.

때묻지 않은 산행 백두대간...

소박하고 웅장하고 장엄한 자연 그대로의 백두대간...

3년이상 사계절을 고루 종주하면서 기후와 계절의 변화를 만끽하면서 종주한 백두대간...

지리산 중산리로부터 설악산 진부령까지 즐펀한 능선과 우뚝한 봉우리를 지나며 가지각색의 야생화, 산나물과 약초, 상록수와 낙엽수를 본다.

세찬 비바람에 시달리며 바위 위에서 용트림하는 소나무,

질펀한 고원의 쭉쭉 곧게 뻗은 나무숲,

언덕 위의 외로운 나무,

절벽 낭떠러지 위에 매달려 처진 나무,

각종 자연 그대로의 나무를 수없이 많이 보았다. 전에는 집에서 키우는 화초만이 예쁜 줄 알았는데 등산을 하면서 이제야 야생화의 아름다움에 반했다.

나는 근래에 시간이 나면 산에 자주 오른다. 푸른 산이 어서 오라 나를 부르기 때문이다. 나무 가지들이 바람에 나붓기며 나를 오라 손짓한다. 신선한 공기가 내 마음을 상쾌하게 만들어주며, 맑은 물이 내 마음까지도 맑게해 주며, 나무그늘이 나의 이마의 땀을 씻어주며, 가냘픈 풀잎들이 보드럽게 내발길에 와 닫는다.

산행은 먹고 놀고 즐기며 구경만 하는 것이 아니고 어려움을 겪고 참고 견디는(難關을 體驗하고 忍耐하고 克服하는) 훈련이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절제하고 절도있게 살아가는 방법도 산행에서 배운다.

우리는 계속 능선만으로 종주하다가 구간을 마치고 계곡으로 내려 갈 때 물을 만나면 반갑게 목마름을 해소하고 간단히 목물로 땀을 씻어내는데 그것도 백두대간에서 빼어놓을 수 없는 즐거움의 하나다.

지리산 천황봉에서 북쪽 향로봉으로 향하는 백두대간은 앞으로 몇 차례 산행을 하고 나면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실은 향로봉에서 백두산 천지까지 완주해야 하는데 반 토막 남은 구간은 언제 마저 마칠 수 있을지 모르겠다. 그리고 백두산 천지는 중국측만 종주하였으나 천지라도 빨리 일주하고 돌아오고 싶다. 금강산도 가는데 백두산이라고 못갈까? 빠른 시일내에 이루어 질 것만 같다.

동문산악회 회장님과 임원들과 산행동문들의 봉사정신과 희생정신에 감사를 드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