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적 설악산 하면 기억나는 건 소공원 입구의 반달곰 동상이 전부였습니다. 그런 제가 설악산 서북능선 종주를 한다는 게 믿기지 않았고, 게다가 인생 첫 야간 산행이라는 사실에 긴장이 돼서 그런지 출발 전까지 잠은 안 오고 준비물만 여러 번 챙겼던 것 같습니다.
다행히 지난 3산 종주를 하면서 깨달았던 주요 준비물(파스 스프레이, 전해질 음료 등)을 잘 챙길 수 있었습니다.
토요일 밤 11시 반, 교대역에서 출발한 버스는 새벽 3시가 조금 안 되어 한계령에 도착했습니다. 입산 개방 시각에 맞춰 칠흑 같은 어둠 속을 헤치고 첫발을 내딛는 순간, 예전 히말라야 셰르파의 명언이 생각났습니다.
"딴 데 보지 말고 앞사람 발뒤꿈치만 봐라. 딴 데 보는 순간 무서워서 못 간다."
깜깜한 길 위에서 앞사람의 발만 보며 졸졸 따라가는데, '아, 앞사람이 길 한 번 잘못 들면 우리 전부 큰일 나겠구나'라는 두려움과 리더의 중요성에 대해 동시에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한계령 삼거리에서 우측 대청봉을 뒤로하고 좌측 귀떼기청봉으로 향했습니다. 악명 높은 1km 너덜길은 길이라기보다 산사태 현장의 뾰족한 바위들을 대충 내팽개쳐 둔 돌밭 같았습니다. 한 발 잘 디디면 생존, 삐끗하면 발목이 나갈 것 같은 사투를 벌이던 중, 멀리서 붉은 일출이 터져 나왔습니다. 영화의 한 장면 같은 장관에 잠시 숨을 고르며 '아, 이 맛에 산행을 하는구나’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날이 완전히 밝고 라이트를 끄자 비로소 팽팽했던 긴장이 풀렸습니다. 귀떼기청봉을 지나 장승령까지 능선을 굽이굽이 넘어가는데, 마치 산신령이라도 된 듯한 착각에 빠져 풍경을 감상했습니다. 중간에 아침 겸 점심을 먹었는데, 김현석 선배님이 준비해 주신 신박한 라면은 정말 잊지 못할 맛을 선사했습니다.
대승령을 지나 하산하는 길, 고희를 넘기신 원로 대선배님들이 제 앞뒤에서 날아다니시는 모습을 보고 경악을 금치 못했습니다. 겨우겨우 걸어가는 제 자신이 살짝 부끄러워지면서도, 훗날 저도 저렇게 멋지게 늙고 싶다는 강한 동기부여가 되었습니다.
복숭아를 닮은 복숭아탕과 선녀탕 계곡을 지나 마침내 하산을 완료했습니다!
아래서 반갑게 맞이해 주시는 선배님들의 얼굴을 보니 묵직한 뿌듯함과 함께 근거 없는 자신감이 생겼습니다. 물론 다음 주 5산 종주를 하고 나면 급격히 겸손해지겠지만, 오늘만큼은 무엇이든 다 할 수 있겠다는 생각이 드는 벅찬 하루였습니다.
감사합니다.
57회 권익상
이렇게 힘든 산행을 극복했으니, 앞으로는 어떤 산길도 자신있게 갈 수 있으리라..
조만간 익상후배를 중심으로한 57회 동기산악회의 발대식을 기대해 봅니다.
조만간 익상후배를 중심으로한 57회 동기산악회의 발대식을 기대해 봅니다.